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3) (백성호著, 판미동刊)
3장 전통 건축과의 소통
김개천(국민대 교수): 행복은 비유비무, 흐르는 대로 흘러라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필요하지만 성찰이나 명상으로 좋은 삶의 기준을 찾으려 하는 것은 옛날식이라 생각해요. 그냥 자신 모습대로 살면 돼요. 자신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자신’이 있느냐는 거고, 그게 얼마나 멋진 것인가 하는 거예요.
살다보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죠.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 문제를 해결할 정답 얻기에 골몰해 왔어요.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문제자체가 우리 삶에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왜 꼭 정답만 찾아야 할까요? 세상에 편하고 좋은 것들만 있는 건 아닌데 그런 것들만 정상이라 여기며 이게 아니면 안 돼 라고 말해 왔죠. 과연 삶에 정상, 비정상의 구분이 있을까요? 정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죠. 정상과 비정상, 옳고 그름에 대한 구분이 없어져야 진정 ‘창의적인 삶’을 살 수 있어요. 그렇지 않으면 삶이 획일화됩니다.
그가 찍은 방점은 ‘창의적인 삶’이다. 이게 정답이다, 저게 정답이라고 미리 정해두면 오히려 진짜 답을 찾는 데 방해될 뿐이다. 정답을 따라가는 삶, 그게 정말 정답일까. 반대로 오답만 적으며 사는 삶, 그게 오답일까. 그건 단지 미리 만들어둔 답지를 기준으로 판단하는 삶이다. 누군가 만들어 둔 정답, 누군가 만들어 둔 오답일 뿐이다.
다들 행복의 정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저 멀리 ‘행복’이란 깃발을 설정해 놓고 달려왔으나 문제가 생겼어요. 깃발은 손닿지 않는 저 멀리에만 있다는 거죠. 깃발만 좇다보면 눈앞의 현실을 놓치게 되고요. 그래요 저는 행복이란 없다고 생각해요 굳이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우리 일상 속에 녹아있는 아주 많은 이름을 꺼내야 해요. 성취, 만족..., 그런데 때로는 슬픔이나 불편함도 행복이 될 수 있어요. 행복을 멀리, 따로 설정해 두기에 우리가 현실에서 행복하지 않은 겁니다. 이때 눈앞의 현실은 평가절하 되고 무시돼요. 현실이란 항상 ‘부족한 상태’ 아니겠어요? 결국 그런 삶이 모인게 우리 삶이 아니면 뭐가 삶이겠어요?
7장 미학의 발견
진중권(동양대 교수): 위너가 별건가? 행복한 사람이 위너지
가끔 CEO들을 위한 인문학강좌에 불려가서, 남부럽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삶에서 ‘인생의 헛헛함’같은 것을 보게 된다. ‘성공을 이뤘는데 무엇이 풍성한 삶인가 한 번도 생각 안한 채 달려온 거예요. 그저 남들 따라 명문대에 가고 대기업에 들어갔어요. 자기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구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내 인생은 과연 뭔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한 거죠.
다들 삶에서 무언가를 좇는다. 때로는 그게 내가 원하는 것이고, 때로는 남이 원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 철석같이 믿었는데 뒤늦게 깨달을 때도 있다. 그게 남이 원하는 것이었음을 말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삶을 돌아본다. 그리고 허함을 느낀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삶을 송두리째 관통하는 허전함을 느낀다. 그럴 때 두렵다. 내게 주어진 삶을 행여 잘못 쓰거나 이미 반환점을 돌아 버린 건 아닐까. 우리는 삶에서 수시로 마주치는 그런 순간들을 두려워한다.
내성적이고 조금 삐딱하며 실수 많은 삶을 살았는데 그를 치유한 것은 ‘파우스트’의 한 구절, ‘인간은 노력하는 한 실수하기 마련이다.’라는 대목이었어요. ‘실수 많이 하는 걸 두려워 말자. 그게 두려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나. 내가 실수하는 건 노력한다는 증거다. 그러니 주눅 들지 말자.’ 소설과 나의 고통이 마주치는 순간인데 예술을 통한 치유는 늘 그런 순간에 일어납니다.
동태전에 술국 곁들여 막걸리 한잔 하는데 너무 맛이 있더군요. 삶이 아름다워지는 거죠. 죽으면 이거 못 먹어요. 무슨 그리 대단한 행복이란 게 있다고. 한 끼 10만 원짜리 식사라도 연속해서 먹으면 질려요. 그때는 분식집 라면이 더 맛있죠. 행복해지는데 많은 돈이 필요한 건 아니에요. 그냥 내게 이미 있는 걸 찾으면 쉽게 얻을 수 있죠.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게 이미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과‘내게 없는 것’만 보는 사람. 이 둘의 차이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행복을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결핍만 보는 사람은 끝없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
내 삶의 끝 날에 ‘아 나는 재밌고 만족스럽게 살았어.’ 하면 그가 위너예요. 위너가 별다른 건가요? 행복한 사람이 위너지.
9장 동양신화의 발견
정재서(이회여대 교수): 그대, 곤륜산으로 가고 있는가
주나라 목왕이 망해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불사약을 갖고 있는 생명의 여신인 서왕모를 찾아갑니다. 여덟 필의 준마를 끌고 불길이 치솟는 영화산을 지나 새의 깃털마저 가라앉는다는 약수를 건너 마침내 곤륜산에 다다릅니다. 이곳에서 서왕모와 사랑에 빠진 주목왕은 여신에게서 갱신의 힘을 얻습니다. 이 신화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며 ‘서유기’로 옷을 갈아입죠. 곤륜산에 불사약이 있다면 손오공이 찾아가는 서역 영산에는 불경이 있는 겁니다.
주목왕이 간 길을 손오공이 밟는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서역, 곤륜산, 에덴동산, 무릉도원, 유토피아 등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다. 현실에선 찾을 수 없는 이상향이다. 서사적으로 가능한 곳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곳입니다.
서역을 향해가는 손오공은 우리의 ‘자아’를 상징합니다. 意馬心猿(의마심원: 생각은 말처럼 날뛰고 마음은 원숭이처럼 까분다.)이란 말이 있어요. 손오공이 요괴와 싸우는 건 ‘나’의 욕망과 희로애락을 하나씩 깨부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하나 나를 이겨내며 서쪽으로 나아갑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아의 각성, 깨달음이죠.
치유와 행복은 연결되어있다. 다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으로 여긴다. 곤륜산, 무릉도원, 서방정토에나 있는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현실은 힘겹다. 아무리 애써도 행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고개를 더 서족으로 돌려 아득한 곳의 행복을 기대한다.
만족을 알고 멈출 때 행복함을 알게 된다. 치유가 되는 경지가 행복이라 했으니 치유 또한 거기서 이루어진다. 만족을 알고 멈추는 것, 그것은 ‘내게 없는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게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그걸 온전히 이해하면 하늘과 땅이 뒤집어져 곤륜산과 서역이‘머나먼 곳’이 아닌 ‘지금 여기’가 된다.
10장 자연의 순리
최재천(국립생태원장): 땀 흘리며 살되 욕심내지 않기
대부분은 일과 행복이 분리된 삶을 살죠. 하지만 저에게는 그냥 일이 행복이니까. 방황하고 방황하다가 어떻게 마지막 순간에 이걸 찾았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너무너무 고맙기만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고 진정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이가 얼마나 될까. 젊은 친구들 중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모른다면 악착같이 찾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열심히 적극적으로 사는 겁니다. 그러면서 많이 바라지 않습니다. 나중에 약간의 성과라도 얻어지면 그것이 아주 행복하게 만듭니다. 생각해보니 저는 늘 그렇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행복합니다.
13장 정약용의 실학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더불어 삶’의 참 의미를 다산에게 배우다
다산은 타고난 성품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덕이 될 수 없다고 했다. 그게 다산의 행복론 이기도 해요. 공자가 말한 知行合一(지행합일), 진실한 기쁨은 앎을 행하는데서 얻어진다는 거죠. 浩然之氣(호연지기)도 그래요. 의로운 일을 함으로써 당당해지는 거예요. 정말 선하고 옳은 일을 행하면 절대 위축될 수가 없거든요.
28세에 급제한 다산은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사후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교옥에 연루되어 정치적 몰락을 경험했다. 첫째형과 매형은 형장의 이슬이 되었고 둘째형 약진과 함께 기나긴 유배에 처해졌다. 하지만 다산은 ‘이제야 내가 겨를을 얻었다.’했다. 세파에 시달리느라 책 읽고 글 쓸 시간이 없었는데 하늘이 준 기회라 반겼습니다.
다산은 好學者(호학자)이자 현실개혁가였습니다. 사람노릇을 하려면 독서를 해야 한다고 했어요. 18년 유배를 당하면서도 불행하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자기 너머의 바깥 즉, 국가와 농민과 없는 사람들을 바라봤죠. 그런 몇 가지만 배워도 우리가 다산을 통해서 큰 지혜를 얻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그게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행복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