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2) (백성호著, 판미동刊)
1장 공자, 노자의 자기혁신
한형조(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배우고 때로 익히면 어찌 즐겁지 아니하랴
유학의 본질은 마음훈련이다.
‘당파싸움, 경직된 예법’등의 이미지로 인해 유학은 고리타분한 학문이다. 그러한 시선에는 유교가 진리를 찾아가는 터널이 아니라 특정 이익집단의 지배도구로 전락해 버렸다는 회의가 담겨 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유교(유학)를 心學(심학) 즉 ‘마음의 훈련에 관한 학문’이라 말한다.
‘초기 유학은 心學을 거론하지 않다가 맹자가 유교를 재발견하며 마음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끌어들였습니다. 放心(방심)이란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를 가리키며 자기망각, 자기소외죠. 가령 개나 닭이 집을 나가면 온 동네를 찾는데 정작 마음을 잃으면 찾을 생각을 안 해요. 자기를 모른다는 것, 이게 心學의 첫 번째 주제입니다. 두 번째는 마음의 굴절, 왜곡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령 무명지가 굽어져 있다면 용한 의사를 찾는데, 마음이 굽어져 있는 것은 고치려 하지 않아요. 자기를 모른다는 것과 병든 마음이 고착된 상태, 이것이 유교 심학의 핵심적 성찰주제로 이러한 코드는 불교, 노장사상과도 해법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상처의 근원은 무엇인가
먹고 살기 위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수많은 개인이 마음의 짐을 걸머지고 산다. 그 짐이 무거울수록 개인이든 집단이든 히스테리 수치는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받고 그로인해 고통이 생기고 괴로워하는데 도대체 상처라는 것은 무엇이고 왜 생기는 것일까?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에 ‘訂頑(정완: 완고함을 바로잡다.)’이란 말이 나오는데 心學이 바라보는 것이 그 완고함입니다. 완고함은 고집이자 편견으로 그 토대이자 動因(동인)은 私的 自我(사적자아)입니다. 모든 사태를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오래된 습성을 말합니다. 퇴계는 ‘돌 같은 이 완고함을 풀어나가야 소통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심학훈련의 목표이며 이것이 안 되면 어떤 이야기를 해도 통하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나와 세상이 어긋나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며 상처와 고통의 시작점이다. 우리는 대부분 상처의 바다, 고통의 광야에서 길을 잃고 출발점도 상실한다. 어디서 어떻게 어긋났는지 알지도 못하고 아파할 뿐이다.
자기중심적 속성이 상처를 만든다 했으니 사적 자아가 강할수록 상처도 커집니다. 비난을 받았을 때 정당한 비난은 발전의 거름으로 삼고 정당하지 않으면 무시하면 되지만 사적자아가 큰 사람은 성찰해 보기도 전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상처를 증폭시키게 됩니다.
힐링의 시대를 바라보는 유학의 시선
힐링이 유행이지만 유교는 위안을 주지 않습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상처받은 자에게 위로를 주고 힐링을 유도합니다만 유교는 모든 문제가 너로부터 오고 너로 인해 일어난다고 말하죠. 상처를 있는 그대로 신랄하게 바라봅니다. 유교는 성찰의 학문이지 위로의 학문이 아닙니다. 그래서 종교적 베이스가 약한 대신 현실적인 추동력이 있는 겁니다.
위로는 일시적인, 혹은 일회적인 마사지 일수도 있어요. 마사지를 받아도 시간이 지나면 근육이 뭉치듯 마음도 뭉칩니다. 이렇게 보면 위로는 ‘따뜻한 속임수’일수도 있는 거죠. 중용이나 대학에 ‘화살이 빗나가면 과녁이 아니라 자기를 탓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의 근원이 자기이니 바깥에 대고 징징거리지 말라는 얘기죠. 어차피 시련이나 상처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것들이죠. 원망만 하고 있으면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안 돼요.
어떤 일이 외적 환경에 의해 구성되는 몫은 1/3이고 나머지 2/3는 나에게 달려 있다고 봅니다. 승승장구하다 유배 가는 선비도 유배 가는 상황이 1/3이면 그 선비가 어떻게 상황에 대응할 것인가가 2/3입니다. 유배에 매몰되지 않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가다듬는 것이죠. 이순신 장군처럼 선조에게 받은 고문조차 고려의 대상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을 향한 책임의식으로 똘똘 뭉치는 거죠. 그러한 과정에서 운명과 마주하는 나의 ‘맷집’이 길러지는 것이고 맷집을 기르는 것이 유교에서는 힐링입니다.
핵심은 나를 보는 것에 있다.
각성 자체가 치유를 보장하며 그중에서도 핵심은 ‘보는’ 일이다. 불교와 주자학 모두 우리가 사태를 정확하게, 차갑게, 객관적으로 보지 못함을 문제 삼는다. 조망하지 못하고, 자기 식의 기대를 하고, 안되면 상처받는 연쇄의 고리가 이어진다. 이는 곧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 얼마만큼 객관적으로 보는가에 따라 치유의 정도가 결정된다는 말과 같다. ‘장자에 나오는 우물 안 개구리의 비유입니다. 어느 날 자라가 찾아오자 개구리가 ‘얼마나 행복한 삶터인지 몰라, 들어와.’ 라고 했지만 자라는 다리가 걸려 들어가지 못합니다. 대신 자라는 바다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다는 넓어서 우임금 때는 아홉번의 홍수, 탕임금 때는 일곱번이나 가물었지만 물이 늘거나 줄어들지 않았고 엄청난 수의 생명이 살고 있어.’ 그러자 개구리는 말합니다. ‘뻥치고 있네!’ 우물 안 개구리, 자기중심성, 그게 모든 병의 근원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깰 것인가? 한교수는 노자와 장자의 坐忘(좌망: 너를 잊으라.)을 제시 했다. ‘너의 상처는 너의 좁은 자아로 인해 생긴 것이니 결국 좁은 자아를 깨라는 것이죠.’ 유교는 ‘일상’속에서 자기를 깨는 훈련법을 제시했다. 퇴계는 성학십도에서 ‘마음속의 초월적 지평을 떠올리고 주시하는 자세’를 권면했다. 경건한 마음에 굴절된 자아가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것이란다. 그 상태에서 마음의 충돌을 주시하면 개선이 시작된다. 우리 선비들이 행한 일상의 수행법에는 그와 같은 명상과 독서가 주를 이뤘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 문안하고 독서와 명상으로 천리와 함께하려 窮理(궁리: 절실하게 이치를 구하는 것)한 겁니다. 지식을 탐구하는 것으로 그때의 지식은 사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것입니다. 格物致知(격물치지)란 지식의 끝까지 궁리해 보라는 말이죠. 스티브잡스가 인상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한 분야에 필요한 지식을 바닥까지 파보는 사람이 없더라.’그게 충격적이다. 잡스는 바닥까지 궁리했기에 제대로 파악하고 진정한 혁신을 했습니다.
율곡이이가 ‘격몽요결’에서 말한 훈련법이 쉬울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立志(입지)로 자신안의 문제를 발견하고 혁신하려는 목적을 세우는 것이다. 다음은 革舊習(혁구습), 잘못된 생활습관을 고친다. 세 번째는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는 持身(지신), 네 번째는 고전을 읽는 독서다. 특히 독서는 삶의 이치, 인간의 이치, 세상의 이치에 대해 생각하고 읽어내는 힘 즉 통찰력을 길러준다. 진리는 본시 오래된 것이며 오류가 새로운 것입니다. 고전은 시공간을 넘어서는 이치에 대해 정확한 풀이를 제공하는 지침입니다. 세월과 환경은 비록 달라졌지만 인간의 생물학적 구조는 바뀐 게 없습니다.
대학가고 취업하고 세상에 적응하기도 바빠 성찰의 기회가 드물어요. 그러다보니 언젠가 ‘인생의 사춘기’가 찾아올 겁니다. 우리가 놓친 것을 보게 될 거고요. 고은 시인의 시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올 때보지 못했던 그 꽃’처럼 그 때가 고전을 만날 기회입니다. 우리가 놓친 삶의 진실들을 바라보게 하는 인문학으로서
배움에서 기쁨을 가꿔라.
삶에는 喜怒哀樂이 있으나 한국인은 怒와 哀가 주축이고 喜와 樂은 약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놓치고 있는 지평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문학코드는 분노와 슬픔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喜는 지속적이고 은근한 기쁨, 樂은 직접적인 기쁨으로 喜樂이 곧 행복입니다. 喜樂중에도 喜가 더 중요하며 그것을 얻는 통로가 바로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 때때로 배우고 익히는 것)이다.
평생 먹고살려 노력해온 부부가 노년에 무의미한 일상을 사는 풍경은 얼마나 쓸쓸한가. ‘배우고 익힘’은 스스로 엔터테인먼트한다는 말과도 같다. 노년이 되어 이런 영역이 없으면 남은 인생이 불행해 집니다. 인문학 공부는 喜를 얻는 과정이며, 怒와 哀를 불식할 수 있는 처방이기도 하다. 배움으로써 얻어진 기쁨은 독립적이고 세련된 삶을 안겨준다. 서로를 건강한 에너지로 채워 부부, 부모 자식간의갈등과 소외를 극복하게 해준다.
물질적 가치를 뛰어넘어 유희의 지평이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삶의 본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각성이 일찍 올수록 좋고 그래야 변화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통념과 습관, 시류의 강물에서 한걸음 물러서는 혁명적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이 오십에 이르러 ‘내가 그동안 뭘 했지?’하며 회한을 느끼지 않으려면 말이죠.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요하고 건강하면 행복하다는 소유의 방식에만 안주해 왔어요. 그런데 인생의 사춘기를 맞으면 존재의 양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겁니다.
한형조 교수는 배움으로써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존재의 충일함을 느끼며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배워라. 상처로부터 배우고 고전으로부터 배워라. 그 모두를 통해 우리는 고통 속에서‘나’를 배우는 이치를 터득한다. 그렇게 터득한 이치가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한다. 지혜롭게 한다.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궁리 끝에 기쁨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