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1) (백성호著, 판미동刊)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본인에게 물어보는 의문들은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등이 아닐까 한다. 수없이 물어봐도 딱히 정답은 없고 책을 봐도 무릎을 칠만한 뾰족한 답이 없는 것은 우리는 각자 나름의 가치관 속에서 생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혹시 돈 벌기 위해 살고, 돈이 행복이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가랑이 사이라도 지나가겠다는 분들이 계시다면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된다.
여러 의문 중 ‘행복은 어디에 있을까?’ 17명의 한국 대표인문학자에게 물어본 것이 이 책 내용이다. 17명 학자들이 대답한 내용들이 정답은 아닐지라도 ‘유사답안’ 정도만 된다면 책값 15000원이 아깝지 않을 듯하여 책을 뽑아 들었다. ‘유사답안’을 찾지 못했다면 나는 ‘제목’ 낚시질에 제대로 걸린 거다.
한형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유교는 心學입니다. 마음의 훈련에 관한 학문이라는 것이지요. 닭이 집을 나가면 동네방네 찾는데 마음을 잃으면 찾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상한 일입니다. 손가락이 굽었다면 의원을 찾는데 마음이 굽어 있을 때는 고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유교는 무엇을 하라 이야기하지 ‘너 힘들지’하면서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교는 소프트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부모들 대부분이 자식들 상처받을까 잘해줄까만 전전긍긍하는데 그런 배려가 독이 될 수 있지요. 유교가 그렇습니다. 친절하게 정답을 제시하지 않고 스스로 판단하고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김개천 국민대 조형대학 실내디자인학과 교수
그가 찍은 방점은 창의적인 삶이다. 정답을 미리 정해놓고 살게 되면 오히려 진짜 답을 찾는데 방해가 된다. 정답을 따라서 사는 삶, 과연 그것이 정답일까? 다들 행복의 정답을 찾으려고 저 멀리 ‘행복’이란 깃발을 설정해 놓고 달려왔죠. 하지만 깃발은 언제나 손 닿지 않는 저 멀리에만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깃발만 쫒다 보면 현실을 놓치게 되고요 저는 오히려 행복이 없다고 생각해요 굳이 이야기하자면 우리 일상 속에 녹아 있는 아주 많은 이름을 꺼내야 해요. 성취, 만족이랄까 달콤함, 때로는 슬픔과 불편도 행복이 될 수가 있어요.
홍승수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명예교수
천문학은 ‘하늘의 패턴’을 공부하는 학문이고 인문학은 ‘인간의 패턴’을 공부하는 학문이지요. 인간의 행동거지라던가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것에 대한 패턴
지금 이 순간 상처로 고통받을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하나의 축, 즉 하나의 잣대로 상처와 고통 그리고 행복을 바라봅니다. 세모는 늘 세모이고 네모는 늘 네모라는 식으로 바라보는데 그런 태도로는 해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시간을 축으로도 쳐다보고 공간의 축으로도 바라보면 시각이 달라지고 많은 문제가 편안해집니다.
희망이 나를 움직이게 하며 의지가 나를 인내하게 합니다. 희망과 의지가 있다면 생명체는 끊임없이 뭔가를 시도해 나갑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이룰 수 있는 것은 없지만 생명에게는 끊임없이 시도하는 원초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이나미 신경정신과 전문의
시인 랭보가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고 했듯 상처를 받아야 인간입니다. 부모형제, 사제지간에도 상처가 생깁니다. 하지만 상처를 통해 이별도 배우고 만남도 배웁니다. 어쩌면 삶은 상처의 지뢰밭인지도 모릅니다. 고통이 다가올 때 ‘그래 이번 기회에 좀 배우자.’ 쉬운 일이 아니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제가 종갓집 며느리라 일 년에 제사가 12번 이어서 시어머님께 하소연을 했더니 걸레를 도 닦는 도구라고 생각하라 하시더군요. 그 후 내겐 걸레질이 수행이다. 내가 이것을 통해 성장한다 생각했더니 정말로 짜증이 나지 않았어요. 고통을 대하는 눈이 달라진 것이지요.
장하석 캠브리지 대 석좌교수
과학은 명료한 결과를 말하는 영역이고 철학은 손에 잡히지 않는 관념의 세계를 쫒는데 장하석교수는 두 세계를 관통하는 과학철학자이다.
한국을 찾을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잘 살게 된 것이 놀랍습니다. 교양 수준도 높아졌는데 사람들이 불행해 보입니다. 이렇게 잘 사는데 왜 행복하지 못할까? 그리고 이상하게도 아주 획일적입니다. 예전 군사독재의 획일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면서 만들어 가는 획일성입니다. 경쟁이 심해진 거죠. 의대 아니면 법대, 너무 똑같은 목표들만 추구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상상력의 부족이고 서로 가만 놓아두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이 없어요. 이런 상황에서는 개성이 살지 않지요. 개성이 살아나고 만들어질 환경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창의력이 국가경쟁력이라고 외쳐도 획일성이 지배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구호일 뿐입니다. 일상의 행복이나 학문적 행복이 호기심과 통한다고 보는데 남들이 정해준 목표대로 사는 것은 호기심이 없으니 얼마나 불행합니까.
진중권 동양대 교양학부교수
성공은 이뤘는데 무엇이 풍성한 삶인가를 한 번도 생각 안 한 채 달려온 겁니다. 남들 따라 명문대,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자기가 아닌 타인의 욕망을 욕구했다는 겁니다. 다들 삶에서 무언가를 쫒지만 그게 남이 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면 허무해집니다. 저는 삶 자체를 놀이라고 보는데 동태 전에 술국을 곁들여 막걸리 한잔 하면 삶이 아름다워집니다. 죽으면 맛을 보지 못합니다. 내게 이미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내게 없는 것만 보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역사는 흘러간 일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가져다주는 역할이란 관점에서 ‘미래학’이라 할 수 있다. 행복이란 올바른 길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은 돈과 권력이 아니라 가치를 추구할 때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