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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0. 일반화의 오류

장님 코끼리 만지기

by 물가에 앉는 마음

‘일반화의 오류’ 대부분은 부족한 지식과 경험에서 발생되며, ‘일반화의 오류’를 설명할 때 흔히 드는 예시가 ‘군맹무상(群盲撫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이다. 코를 만진 이는 ‘뱀 같다.’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 같다.’했으며 꼬랑지를 만진 이는 ‘무슨 소리야? 채찍 같던데.’했다. 이처럼 코끼리의 일부만 더듬어 정보가 부족한 상태에서 결론내리니 오류가 생길 수밖에 없다.

중국 송나라의 농부가 나무 그루터기에 달려와 부딪친 토끼를 우연히 잡게 되었다. 쉽게 토끼를 잡은 농부가 농사를 그만두고 나무 그루터기만 지키고 있었다. 산토끼는 사람을 경계하므로 농부가 앉아있는 그루터기로 올 리 만무하나 토끼는 다니는 길목으로만 다닌다고 생각했다. 우연히 잡게 된 토끼 한 마리로 인해 농부는 생업을 팽개치고 토끼잡이로 나선 것이다. 守株待兎(수주대토)는 어리석음을 빗대는 말이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오래전에 발생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수주대토에 등장하는 ‘농부’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시각장애인’은 먼 나라 사람이나 우화속 등장인물이 아니라 다름 아닌 현실 속 자기 자신이다. ‘인간은 원래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우리가 정치를 바라볼 때도 본인 정치성향이 ‘선입견’으로 작용되어 있어 상대 정파 정치인을 ‘친일’과 ‘종북’으로 의심하고 비판한다. 여의도 300명 중, 한명의 친척이 창씨개명을 했다든지 6.25전쟁 때 사촌이 부역했던 사실이 밝혀지면 정도가 심해져 ‘확증편향’으로 발전한다. ‘공산주의 추종집단’, ‘친일 매국집단’ 이라고 매도하니 ‘장님 코끼리 만지기’의 ‘시각장애인’이나 마찬가지다.

일상생활에서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도 ‘일반화의 오류’는 내재되어 있다. 흔히 사람을 평가할 때 사용하는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은 개인에 대한 평가이기는 하나 ‘싸잡아 욕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으니 길을 가다 쓰레기 줍는 사람과 쓰레기 버린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만약 쓰레기를 버린 사람이 특정 복장을 하고 있었다면 ‘싸잡아 욕하기’라는 神功(신공)이 등장할지 모른다.

얼룩무늬 군복 입은 예비군이 쓰레기를 버렸다면, ‘예비군은 다 똑같아, 군복만 입혀놓으면 노상방뇨하고 쓰레기 무단투기하고..., 이상하게 개구리복만 입혀 놓으면 멀쩡한 사람도 쓰레기로 변하지?’ 예비군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다 우연히 휴지가 딸려 나왔을 뿐인데 몇 십만 예비군을 하지도 않은 노상방뇨범으로 매도한 것이다. 사실 휴지를 떨어트린 예비군은 평소 성실하고 모범적인 사람이었는데도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일반화의 오류’로 인해 개차반이 된 것이다.


순자의 ‘성악설’과 맹자의 ‘성선설’은 대비되는 논리로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신봉한다. ‘성악설’과 ‘성선설’은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피지배자인 ‘국민’의 속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출발했다. 순자는 사회적 갈등은 인간이 야기하는 것으로 방치하지 말고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로 법과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는 성악설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잘 부합한다.

반면 맹자는 인간은 순진무구한 아기같이 선하게 태어나므로 도덕적 능력을 보살피고 가꾸면 가정과 사회, 나아가 국가가 평안하다고 믿었다. 갓난쟁이나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 ‘성선설’이 인간 본성을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성악설’은 도저히 맞지 않는 논리다.

구성원이 백 명이라면 백 개의 인격과 백 개의 성격이 모인 것이며 해당 집단에는 악인과 선인이 공존한다. 환경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던 악하게 태어났던 소속된 집단의 평균값으로 수렴하게 된다. (악인은 선함을 배우고 선인은 악함을 배워 서로 비슷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과 어떻게 연관지어야 할까?


퇴직 후, 서로 부딪칠 이유가 없어졌으므로 ‘미워했던 사람’에 대한 감정을 누그러뜨리려 하고 있으나 ‘일반화의 오류’가 아직도 나를 제자리에 머물게 하고 있다. 7~8년 전 같이 근무했던 사람이 만나자고 연락 왔지만 머릿속에 남아있는 미워했던 기억이 소환되었다. ‘분명 좋은 일로 만나자는 것은 아닐 거야. 곤란한 부탁을 하려고 연락했을 거야.’라는 생각에 있지도 않은 선약이 있다며 다음에 만나자고 했다. 나는 아직도 그를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일반화의 오류’에 갇혀 기억하고 있다.

내가 바뀌지 않듯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라는 말을 믿고 있다. 인간은 자라면서 선악의 품성이 소속된 집단의 평균값으로 수렴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이 세상은 ‘성선설’에 의해 선하게 태어난 사람과 ‘성악설’에 의해 악하게 태어난 사람이 뒤섞여 공존하며 살아간다는 하는것이 맞을지 모른다.


ps 없는 선약이 있다고 만나지 않았던 그는 前CEO로 한 달 후에 만나자며 재차 연락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곤란한 부탁을 하러왔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오류가 아니라 정확한 金言(금언)내지 名言(명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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