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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두 남자의 수다

세상은 이렇게 좁다. 알고 보니 임 교수님은 학교선배님이시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실망했다. 참여자 명단을 처음 봤을 때 여성분이라 생각했으나 남성분이었다. 실망 이유는 호색한이나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딱딱하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회의나 프로젝트일수록 여성이 참석하게 되면 분위기가 누그러들기 때문이다. 중앙대 임 교수님은 경상북도의 원자력 클러스터 조성을 위한 연구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분이다. 경북도청에서 중간보고 회의가 끝나자 저에게 말을 건네셨다.

‘임 처장님, 서울 갈 때 같은 기차를 타고 가시지요. 제가 커피 한잔 사고 싶습니다.

임 교수님께서 아메리카노를 사시고 나는 보리빵을 샀다. 출장 다닐 때 무엇을 들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임 교수님은 지난번 회의 때 가족들을 위해 호두과자를 사가셨는데 이번에는 저하고 동행하시느라 빵을 사지 못하시는 듯해서 보리빵 두 박스를 샀다.


구수한 커피와 덤으로 얻은 보리빵 한쪽을 드시면서 임 교수님께서 대뜸 ‘등단하셨나요?’ 하고 물어보신다. 출장길에 보려고 수필 월간지를 들고 갔더니 눈여겨보신 모양이다. 허를 찔리듯 질문을 받아 잠시 허둥대다 대답했다.

‘네, 얼마 전에 했습니다.’

‘부럽습니다. 저도 글쓰기를 좋아하는데 시간이 없어 도통 손을 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즈음 수필전문지가 많은데 일반적으로 5편을 응모해서 3편 합격하면 됩니다.’

‘그렇군요. 저는 수필집을 먼저 내려합니다. 수필집을 발간하면 등단한 것으로 인정을 해준답니다.’

‘교수님들은 평상시에 글을 쓰시고 계시므로 교수님은 저보다 빠른 시간에 등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는 매주 직원들에게 편지 보내는 방법으로 연습해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요? 매주 보내는 편지를 저에게도 보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눈썰미가 대단한 교수님께 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편지를 보내 드렸다. 독자로 등록되었으니 싫든 좋든 매주 편지를 받아보셔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마른 체구에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계셔서 선친의 분위기와 닮으신 교수님과 한담이 이어졌다.

‘교수님 제가 요즈음 희한한 병에 결렸습니다. 바이러스성 난청이라고 하는데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다가 면역력이 저하되면 발생된다 합니다. 처음에는 귀에 에코가 생겼다가 갑자기 들리지 않게 되는데 저는 빨리 병원에 갔기에 많이 회복되었고 치료 중입니다. 의사가 비타민을 많이 먹으라고 하던데요.’

‘저희는 중앙대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해주는데 의사가 건강하려면 햇볕을 많이 쬐라고 하더군요. 저는 오찬 후 학교 주위를 산책하고 있습니다. 비타민이 생성되어 면역력증강에 도움이 된다 하니 처장님도 한번 해보세요.’


교수님은 중앙대 부총장을 역임하셨고, 공업화학회 회장, 기업 사외이사, 원자력안전특위위원장 등 많은 감투를 갖고 계신데 사모님께서는 돈 안 되는 직함들을 정리하라고 하신단다. 사실 나열 해보니 직함이 너무 많아 교수님 본인도 정리할 생각이신 것 같다.

30년 직장생활에 아파트 하나, 차 한 대 있는데 돈이 없다는 것에 기죽어 본 적도 없고 불편을 느끼지 못해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 박봉이라 돈을 많이 모으지 못하셨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데 월급쟁이가 부자 되는 것 또한 버금가게 어렵다고 합니다. 거꾸로 이야기하면 월급쟁이가 천국으로 갈 확률이 높다는 것이니 다행스러운 일이지요.’


여러모로 교수님과 비슷하다. 가끔씩 폭주를 하시는 것도 그렇고 강의 자료나 논문을 누구에게 맡겨 본 적이 없다며 이번 프로젝트를 하면서도 본인이 직접 보고서를 작성하시고 취합된 자료를 읽어 보신단다. 담당하신 일이니 당연히 본인이 작성하고 읽어봐야 하나 그만한 직위에 오르신 분이 직접 논문과 보고서를 작성하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광 전기팀장으로 있을 때 운동 삼아 잡초 뽑는 등 허드레 일을 하고 다녔는데 송별식 할 때 직원들이 한 말이 기억났다. ‘팀장님은 권위도 없고 형님같이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데 어느 정도 다가가면 넘어서지 말아야 할 선이 느껴집니다. 그 선을 넘어가면 혼 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조심스러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본인에게 엄격하고 철저하신 교수님을 모시는 학생들과 후배 교수님들도 비슷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교수님은 원자력안전특위위원장이시니 최근의 원자력 비리에 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제가 요즈음 우리 식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정년이 30년 남았다면 임금인상 포함하여 앞으로 기대수익이 30억 원이다. 부정한 돈을 50억 원 정도 갖고 오면 받을까 말까 고민해라. 하지만 50억 원 미만의 돈을 갖고 왔을 때는 고민하지 말고 단번에 거부해라. 결코 이익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면 직원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또, 우리 회사에는 일 년에 한 명, 당해의 최고 기술자를 선발하여 ’ 한전 KPS인 ‘ 상을 줍니다. 현대자동차 등 사기업에도 비슷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데 5천 명 직원 중 한 명에게만 주는 영예로운 상으로, 상을 타게 되면 언행에 조심을 해야 하므로 비리와 관련되기 어렵고 심지어는 유흥주점에 가는 것도 꺼리게 됩니다. 저도 15년 전에 상을 탔는데 주위 동료와 선, 후배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강박감으로 처신에 조심하고 있습니다. 전 직원에게 상을 주면 비리가 없어지지 않을까 하는 허황된 생각도 해봅니다.’

‘맞는 말씀이시고 좋은 제도입니다. 그런 분들을 회사의 주요 포스트에 위치시켜 직원들에게 기술뿐 아니라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최근의 원자력 비리는 기술적 문제라기보다는 인성 문제로 인해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항들도 그렇지만 결국에는 운영하는 사람이 문제지요.’

현실은 모르고 이론적으로만 박식할 줄 알았던 교수님들에 대한 편견을 없애주셨다. 대구에서 서울로 오는 두 시간 남짓 기차여행이 코드가 비슷한 두 남자의 수다로 인해 쏜살같이 지나간 듯하다. 임 교수님과 다음 동행 때 임 씨 집안 족보를 따져보면 조금 더 친밀한 사이가 될지 모르겠다.


PS: 편지를 보냈더니 답장 여럿이 도착했다. 주인공이신 임 교수님은 ‘그러지 않아도 둘이 만나 모둠전에 술 한 잔 하고 싶었는데 以心傳心으로 실명까지 거명하며 광고해 줘서 고맙다.’는 답장을 주셨다.

롤 모델이신 퇴직 선배님께서는 ‘경기고, 서울대, 퍼듀대 졸업, 원자력연구원 재직 시 동료, 축구 잘함’이라는 깨알 정보를 주셨다.

사촌형님은 ‘학회 일을 같이 하고 있는 대학선배님이며 술자리에서는 다정다감하며 업무는 매사 꼼꼼하여 본보기가 되는 분’이라며 답장을 주셨다.

사촌 형님 연락을 받은 임 교수님이 다시 전화를 주셨다. ‘사촌형과는 형제 같은 사이이니 세 사람은 형제나 진배없습니다. 함께 모여 소주 한잔하며 형제의 우의를 다집시다.’

세상은 이렇게 좁다. 알고 보니 임 교수님은 학교선배님이시다. 실명을 거명하여 흉보는 글을 썼다면 큰 일 날 뻔했다. 입이 걸지 않아도 손은 거친 편인데 앞으로는 흉보는 글보다는 칭찬하는 글을 많이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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