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이들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문장이었다.
부모, 조부모님 세대가 사실만큼 사시고 병치레 없이 편안하게 떠나시면 好喪(호상)이라 한다. 好喪이 아니더라도 그럭저럭 오래 살다가 가신분과 편하게 가신 분들 조문 가면 그리 슬프지 않다. 順喪(순상)이니 순리대로 세상이 돌아가는 것이고 연세가 되셨으니 당연하다는 생각에 많은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가장 슬픈 조문은 자식을 보내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이다. 오래전 동료의 어린 딸이 유치원 통학차량 사고로 사망했을 때는 비통해하는 동료를 보고 눈물 흘렸고, 사진 속 아이가 불쌍해 다시 한번 눈물 흘렸다. 인명은 재천이고 ‘태어나는 순서는 있어도 떠나는 순서는 없다.’ 해도 너무 이르고 너무 가혹한 일이다.
부모님께서 먼저 돌아가시는 順喪은 시간 지나면 잊히지만, 자식이 먼저 죽는 惡喪(악상)을 당하면 부모는 자식을 보내지 못하고 가슴에 묻는다.
동시대를 살았고 같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던 동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입사했으며 연배도 비슷해 희로애락을 같이했던 동료들이다. 가까웠던 아니면 소원했던 사이라 해도 떠나는 뒷모습과 사연은 하나같이 안타깝다. 입동 지나 초겨울이지만 기온은 늦가을처럼 푸근하다. 하지만 왠지 마음이 춥다.
해가 바뀌자마자 고교동창 절친도 세상을 떠났다. 지난 연말 모임에서 먹은 탕수육과 깐소새우가 마지막식사, ‘다음에 보자.’라는 인사가 작별인사가 될 줄 몰랐다. 봄에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빨리 보고 싶었는지 동창들을 喪家에 모이게 했다. 근 50년을 몰려다니며 노느라 군대도 한꺼번에 가고, 결혼도 비슷한 시기에 했던 친구들이다. 친구들의 축축해진 눈은 흔들렸고 행동은 어색하고 허둥댔다. 마음은 춥다 못해 시렸다.
연배 되신 선배님들 부고장을 당연하게 받아 들곤 했지만 비슷한 또래들이 떠나니 마음이 혼란스럽다. 64세,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83.5세이니 세상을 뜨기에는 이른 나이이며 60에 정년퇴직 했으니 남은 인생을 충분히 즐기지 못했을 나이다. 떠나는 이들 또한 같은 생각 하며 먼 길 떠났다면 발길이 무거웠을 것이다.
마음이 혼란스러운 것은 현실을 도피하고 싶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마음만 청춘이라 우물쭈물 먹은 나이를 인정하기 어렵다. 듣는 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耳順(이순)이 넘었지만 보고 듣고 닥친 현실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人命在天(인명재천)이라 하는데도 하늘의 뜻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부족한 탓이다.
최근 ‘늙어갈 용기(기시미 이치로著, 에쎄刊)’,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찰스 핸디著, 인플루엔셜刊)’, ‘메멘토 모리 (이어령著, 김태완역음, 열림원刊)’ ‘김형석의 인생문답 (김형석著, 미류책방刊)’등 예전보다 늙음과 죽음과 관련된 책 읽는 빈도가 높아졌다. 나름대로 연배에 맞는 책을 보고 다가오는, 겪어야 할 삶을 미리 준비한다고는 하나 연습과 실전은 무척 다른가보다.
떠날 때는 순서도 없고 이르고 빠른 것도 없다. 맞다 在天(재천)이다. 떠나는 동료들 소식을 접하고, 하시라도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나 시간 지나면 동료가 떠났다는 사실조차 잊힐 것이다.
잊더라도 떠나는 순서가 오기 전까지 필요한 것을 꼽아본다. 조금 더 겸손한 태도도 필요할 것 같고 배려와 역지사지하는 마음 역시 갖춰야 할 것 같다. 이도 저도 생각나지 않을 때는 허리 굽히는 것이 상책이다.
오늘은 떠난 이들을 위해 문장을 고르려 했지만 ‘무슨 필요 있을까?’ 읽어보니 떠난 이들을 위한 문장이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문장이었다.
상갓집 등이
밝다!
등만 밝은가?
그이 생애도
밝았는가?
- 이철수 조등 -
내 나이까지 살아보니 내가 나를 위해서 한 일은 남는 게 없어요. 돈, 명예도 얻고 자랑스럽게도 산 것 같지만 마지막에 가서 보면 내가 나를 위해서 산 것은 흩어지고 말아요. 그런데 이웃과 더불어 사랑을 나눈 사람, 사회에 한신한 사람, 거짓 많은 세상에 진실하게 산 사람, 정의롭게 산 사람은 인생의 마지막에도 남는 것이 있어요. - 김형석의 인생문답 (김형석著, 미류책방刊)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