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서 봄을 spring이라 하나보다.
남향에다 앞이 트여 하루 종일 볕 잘 드는 거실에 앉아 눈높이에서 펼쳐진 백목련이 만들어낸 한 폭의 그림을 구경하는 것은 짧은 기간에만 누릴 수 있는 사치다. 꽃샘추위는 있지만 예년보다 꽃소식이 빠른 듯하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집 앞 나무들의 개화시기가 가장 빠르다.
가장 빨리 동그란 꽃망울을 터뜨리는 동백과 홍매화를 시작으로 경쟁하듯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꽃피는 계절이 열리고 봄꽃들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산수유도 옅은 노란색 꽃을 피웠다. 산수유에게 미안한 이야기지만 멀리서 보면 꽃 같지 않고 한그루만 있으면 예쁘지도 않고 어색하기도 하다. 산수유는 군락을 이루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예쁘다. 3월 중순인데 백목련이 활짝 폈다. 북향에 있는 목련은 아직 꽃망울이 단단해 벌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듯하다. 산수유와 달리 목련은 한그루만 있어도 화려하고 단아하다. 화려함과 단아함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 같지만 목련은 예외다. 목련의 순백은 단아하지만 화려함을 감추고 있고 화려한 듯하지만 절제미가 있다.
마르고 앙상한 꽃대에 물이 오르면 손톱만 한 버들강아지 꽃술이 부푼다. 자세히 보면 솜털사이에 좁쌀보다 작은 노란색과 빨간색 꽃이 피어있다. 버들강아지만으로도 앙증맞은데 노랗고 빨간 꽃이 피는지 최근에서야 알았다. 꽃은 너무 작아 눈을 가까이해야 겨우 보일정도다.
버드나무도 물이 올라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솜털 날리지 말고 그대로 멈췄으면 좋을 덴데 그것은 인간의 속 좁은 바람에 지나지 않고 버드나무도 종족을 번식하려면 코를 간질거리게 하는 꽃씨를 날려야 한다. 개나리와 진달래도 활짝 피었다. 너무 흔한 꽃이지만 항상 주변에 있으나 가장 정겨운 꽃이다.
살구나무도 분홍색 꽃을 피웠다. 살구꽃은 매화와 비슷한 동그란 봉오리를 만들었다. 매화와 살구는 사촌지간인지 꽃피는 시기만 다를 뿐 꽃봉오리 생김새, 가지가 뻗은 모양, 열매 생김도 비슷하다. 앵두나무도 수줍은 하얀 꽃을 피웠다.
아내도 할미꽃을 좋아한다. 이른 봄이면 태재고개 넘어 정몽주선생묘소에 가곤 갔다. 공해에 약하다는 할미꽃이 도심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라 영월에 있는 동강할미꽃을 보러 가는 사람들도 있다. 분당에서는 영월까지 가지 않아도 할미꽃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다.
왜 무덤가에만 할미꽃이 피는지 몰라도 몇 년 전 중앙공원 한산 이씨 선산에 핀 할미꽃을 발견했다. 올해도 무덤가를 찾으니 할미꽃이 꽃대를 빼꼼 내밀었다. 밟을까 걱정되어 조심스레 다가갔다. 다음 주 정도면 솜털 보송한 자주색 꽃을 피울듯하다.
탄천 변 벚꽃은 아직 만개하지 못했으나 양지바른 곳에서는 봉오리를 먼저 터뜨리겠다고 와글와글하다. 눈높이를 낮춰도 먼저 피겠다고 재잘대는 소리로 가득하다. 유해 외래종이라지만 노란 민들레는 주인인양 이른 봄부터 일찌감치 자리 잡았다. 언제 봐도 예쁘고 앙증맞은 제비꽃과 꽃잔디도 피었다.
무화과(無花果)는 꽃 없이 과일을 맺는다고 무화과다. 남쪽에서만 자라는지 알았는데 아파트단지 볕 좋은 곳에서 용케 살아간다. 겨울나며 건조된 무화과 열매 세 개를 달고 있는 무화과나무가 모진 추위를 견뎠나 모르겠다. 재작년에는 커다란 나무가 죽었고 어린 나무만 무화과 향을 뿜었는데 아직 물이 오르지 않아 살아 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무화과나무 밑 원추리는 딱딱한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줄기의 기세가 힘차다.
나이는 가을이나 봄 꽃나무 구경은 항상 즐겁고 삶에 활력을 준다. 이래서 봄을 spring이라 하나보다. 봄은 꽃피는 계절을 열고, spring처럼 탄력 받아 라일락, 등나무 꽃, 이팝나무 꽃을 잇달아 불러내고서야 여름에게 자리를 양보할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