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귀고 있던 여자와 헤어지게 만든 악동노릇을 했고
원고 청탁을 받고는 제 筆力을 알기에 고민했습니다. 매주 보내는 편지는 술 먹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듯 쓰는 것이라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대로 쓰고 있습니다만 돈 내고 책 사서 보는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니 고민을 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고민한다고 글쓰기 실력이 한순간에 좋아질 리 없으니 부질없는 일이지요. 이때 필요한 것은 뭐? Speed? No! 배짱입니다! 원고의 취사선택은 편집자의 고유권한이니까 저는 써서 보내기만 하면 됩니다.
4시간 만에
친구들 집을 쥐가 풀방구리 드나들 듯했던 우리들을 어머님들께서는 오 총사라 부르셨다. 고등학교 단짝인 다섯 친구들은 함께 어울려 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해 모두 대학 졸업 후 군대를 갔으며, 약속이나 한 듯 장가도 늦게 들었다. 사실 늦장가 원인은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오면 악동들이 온갖 트집을 잡아 헤어지게 만들었기 때문인데, 결혼하면 친구들끼리의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할까 하는 질투였던 것 같다.
고리원자력발전소에 근무할 때니 25년 전이다. 해병대 장교로 전역한 친구 L이 포항에서 예비군훈련을 끝내고 소주 한잔하자며 전화했다. 그날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 친구와 선약이 있었다. L의 훼방이 우려되긴 했으나 L도 여자 친구를 데리고 나올 예정이라 해서 한편으로 마음이 놓였다. 조금 늦게 나온 L의 여자 친구는 어디서 본 듯했지만, 두 남자는 오랜만에 만난 터라 여자 친구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지난 이야기로 정신이 팔렸었다.
다섯 친구들은 거의 동시에 늦장가를 들었고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교수가 된 친구,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 등 모두 열심히 살고들 있다. L은 처음에는 직장생활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업을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대형승용차와 당시 차 한 대 값이라는 카폰을 사용했으니 친구 중 가장 성공했는데 경제적 풍족함에도 사업상 이어지는 술자리도 피할 수 없었고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L은 어느 날 낮잠 자다 예수님을 영접하고는 사업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불교 집안에서 예수님 믿겠다며 잘 나가는 사업을 접는 것은 성급한 일이라 말렸으나 이미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같이 일하던 직원들에게 퇴직금과 보너스로 본인들이 사용하던 업무용 차를 한 대씩 나눠 주면서 쿨하게 사업을 접었다. L은 신학대학 졸업 후 캄보디아, 태국에 선교사로 다녀와서는 대형교회 부목사가 되었다. 몇 년이 흐른 뒤 친구들과 만난 자리에서 L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내가 교회를 개척하게 되면 너희들이 나와줄 수 있겠니?’ 친구 중에는 가톨릭신자도 있었고 기독교신자도 있었지만 무교인 친구가 답을 했다. ‘네가 교회를 개업하여 영업(?)을 시작한다면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당연히 나가야 되지 않겠냐?’
다섯 친구들은 매월 마지막 주일에는 약속을 비워놓고 곰팡내 나는 지하교회에 모여 예배드리고 점심을 같이 한다. 술 잘 먹고 바람도 잘 폈던 사고뭉치는 낮잠 자다가 인생이 180도 바뀐 것이다. L은 비록 신도 10명의 개척교회 목사님이지만 얼굴이 편안해 보이는 것을 보면 인생항로 수정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한 친구는 IMF사태로 직장을 잃고 택시운전을 했다. 현금 만지는 일을 하다 보니 도박에 쉽게 빠졌고 신용불량자에 당뇨병까지 얻어 도피생활을 하느라 연락을 끊고 잠적했다. 우리들이 오랜 탐문 끝에 찾아낸 친구는 건강도 좋지 않고 초췌해진 모습이었다. 그가 우리를 만나 옅은 웃음을 짓는 것만도 반가웠고 친구도 행복해 보였다. 지금은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지만 짧은 기간 중에 실직, 신용불량자, 도피생활 등 인생의 질곡을 여러 번 겪은 셈이다.
다시 25년 전 L과 만났던 장면으로 되돌아간다. 1차에서 수다 떤 것이 부족해 2차를 가기로 하고는 시간이 늦어져 내 여자 친구는 집으로 보냈다. L에게 물었다.
‘네 여자 친구는 낯이 익은데 혹시 내가 본 적이 있니?’
‘내 사촌 동생이야. 10여 년 전 종로에서 한번 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바로 그 애송이 여학생이었다. 대학 2학년인데도 정신 못 차리고 무교동과 종로바닥을 누비고 다닐 때다. L이 부산 모 대학에 입학한 사촌동생을 데리고 종로통을 나왔을 때가 기억났다. 그때 나는 양아치처럼 다닐 때라 그녀에게는 관심이 없었으며, 여학생 또한 종로통 양아치와 대면하게 되었으니 서로 간에 호감이란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받은 것도 아니니 부산에서 올라온 촌티 나는 여학생에게 서울구경을 시켜준 이후 연락은 없었다.
그런데 짧은 시간 동안 참으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8년 만에 봤는데도 친근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내 여자친구 보다 L의 사촌동생과 결혼하는 것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로 가득한 느낌이었지만 술기운 때문은 아니었다. 결국 만나던 여자 친구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그날 바로 결혼 상대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만난 지 불과 4시간 만에
천안이 고향인 L의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L의 어머님께서는 촉이 발달하셨는지 내가 질녀가 결혼하면 잘 살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L의 할머니께서는 질색하셨다는 후문이다. 찢어진 청바지에 장발을 하고 다니는 불량끼 많은 놈은 안 된다며,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며 반대하셨단다. 하지만 둘은 할머님께서 돌아가신 후 결혼했으니 할머님 말씀을 거역한 것은 아니었다.
부부가 연을 맺는 것은 칠천 겁의 인연이며,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하는데 너무 쉽고 성급하게 결혼상대자를 정했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에게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 말을 들려주고 싶다.
‘배우자를 선택하는 것은 그대 자신의 직감이다.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다른 사람에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 느낌이 너무나 확실하고 절대적이라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물론 ‘오쇼 라즈니쉬’ 말과 같이 순간적인 직감으로 배우자를 선택했지만 항상 직감이 맞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2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짧았던 4시간은 평탄한 삶을 살아온 내 인생의 최대 전환점이었음은 분명하다. 다섯 친구들이 언제나 그랬듯 L은 사귀고 있던 여자와 헤어지게 만든 악동노릇을 했고 평생의 반려자를 짧은 시간에 만나게 해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