캥거루가 50위인데 아버지는 70위에도 들지 못했다.
‘개 같은 내 인생’이나 ‘개만도 못한 내 인생’으로 제목을 붙이려 했는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제목을 강아지 이름으로 바꿨다. 까만 푸들을 입양한 지 2년이 조금 넘었는데 엉덩이와 머리가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검다고 막내가 강아지 이름을 ‘콜라’로 지었다. 처음에는 젖먹이 강아지라 잘 따르고 예뻐했으나 이제는 컸다고 자기 영역을 만들어 기분 나쁘면 으르렁 대기까지 한다. 푸들은 아이큐가 높아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커가는 과정을 보니 아이들과 비슷한 것 같다. 아이들도 성인이 되면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주관이 뚜렷해지면서 부모의 보호틀 내에서 벗어나려 함과 동시에 어릴 때같이 고분고분하지 않게 된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 ‘오빠’하던 집사람과는 동등관계 내지 열등관계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다. 우리 집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가장의 권위가 무너진 지는 오래되었는데 초기 농경시대의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를 거쳐 여권신장에 의해 다시 모계사회로 회귀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닌 것 같다.
2004년 영국문화원에서 비영어권 102개국 4만 명 대상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영어단어를 조사한 결과 1등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어머니(Mother)이며 2위는 열정(Passion), 3위는 미소(Smile), 호박이 40위, 우산이 49위, 캥거루가 50위인데 아버지는 70위에도 들지 못했다.
한때는 말이 없는 태산 같았는데 나이가 들수록 작은 둔덕 같기도 하고 흔들림이 없는 아름드리나무 같았는데 알고 보니 연약한 갈대더라.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휘청거리는 아버지... 적어도 어머니는 이길 수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우산이나 호박이나 캥거루 따위는 이길 수 있는 아버지였으면 좋겠다.
- 고도원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중에서 -
한때는 우리 집 서열 1위는 가장이자 아버지인 내 차지였는데 아내가 아줌마로 변모하면서 2위로 밀리고, 아이들이 장성해서 주관도 생기고 발언권이 생기면서 3위, 4위가 되었으며, 콜라를 입양한 후에는 귀여움에 밀려 서열 5위로 밀렸다. 서열 5위란 마지막 서열로 더 이상 추락할 자리도 없는 자리인데, 서열 4위가 하얀 푸들을 입양해서 ‘사이다’로 이름을 짓자는 의견에 적극 반대하는 사유도 서열 6위로 밀려날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어쨌든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콜라는 부동의 서열 1위가 되었다.
설 연휴 중 서열 1위가 감기에 걸려 그르렁거리며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기침하는 것을 보고 아이와 아내가 말씨름을 한다.
서열 4위: 콜라가 감기에 걸렸는데 왜 병원에 데리고 가지 않아요?
서열 2위: 병원에 전화하니 심하지 않으면 월요일에 오라 하는데...
서열 4위: 역 근처에 가면 24시간 동물병원이 있다는데요.
서열 2위: 그 사람들은 설 명절 안 쉬냐.
서역 4위: 입 삐죽삐죽
얘야, 서열 5위는 급성 바이러스성 난청에 걸렸단다. 서열 5위에게도 관심을 써줘라
서열 1위가 오면서 강아지도 트림하고 방귀 뀌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서열 2, 3, 4위는 서열 5위가 방귀 뀌면 질색해도 서열 1위가 트림하는 것을 예뻐하고 방귀냄새가 나면 인상 쓰면서 서열 5위를 쳐다보다가 서열 1위에게서 냄새나는 것이 판명되면 방귀도 뀔 줄 아냐고 예뻐한다.
서열 1위는 식탐이 강해 앉아 있으면 뱃살이 접힌다. 보신탕은 먹지 않아도 삼겹살 생각이 날 정도다. 하지만 집 식구들은 보들보들한 강아지 뱃살은 예뻐하면서 아빠는 살 빼야 하니 산책시키고 오라며 등을 떠민다. 이것은 서열 5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서열 1위 건강을 위해서이다.
서열 1위가 입양되었을 때 조카가 운영하는 동물병원에 데려갔는데 조카 녀석이 작심한 듯 묻는다.
‘삼촌! 강아지 키우려면 돈 많이 들어가요. 누가 키우자고 했어요?’
‘아이들이!’
조카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한다.
‘삼촌! 정 들면 떼기 힘들어요. 판단을 잘하셔야 돼요. 집안에서 키우는 강아지는 의료보험 안 되지요. 미용해야지요. 좋은 음식 먹여야지요.’
‘아이들이 키우자니 키워봐야지.’
‘돈 많이 드는데...’
실제로 키워보니 예전 마당에 풀어놓고 기르던 강아지와는 차원이 다르다. 강아지 집이 세 채나 되고 강아지 샴푸, 강아지 통조림, 강아지 옷(털 달린 짐승인데 옷이 왜 필요할까?), 서열 1위 옷 상표가 노스페이스다. 물론 짝퉁이지만 이것이 등골브레이커가 아닌가. 아내는 장조림이나 국 끓일 때, 양념하기 전 서열 1위 몫을 떼어 놓는데 이제는 고기 냄새나면 자기 몫이 있는 양 당연하게 달라고 칭얼댄다. 잠 잘 때도 집사람과 내 사이에 들어와 자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얼마 전 서열 2위와 4위가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서열 5위: 그럼 강아지를 애견호텔에 맡기고 가면 되겠네.
서열 4위: 무슨 소리! 아빠가 칼퇴근을 해서 봐줘야지. 얘가 하루 종일 호텔에 갇혀 지내면 우울증 걸리니 안 되지.
서열 2위: 당연하지. 호텔에 맡기면 해외여행 가지 말라는 소리지.
결국 서열 2위와 서열 4위는 서열 1위를 서열 5위에게 맡기고 해외여행 갔고 취직을 한 서열 3위는 출근하면서 당부한다. ‘아빠! 칼퇴근해서 콜라하고 놀아줘. 우울증 걸리면 안 되니까.’
서열 2, 4위가 해외여행을 가고 서열 3위는 직장일로 늦은 날, 서열 1위에게 진지를 갖다 바치느라 칼퇴근한 서열 5위는 진지 드신 서열 1위 배를 긁어준다. 서열 1위는 기분 좋은 듯 길게 누워 눈을 게슴츠레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최근, 좋아하는 색상인 청색남방을 4벌이나 구입하고 나서 여자들이 쇼핑하면 스트레스 풀린다는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 콜라보다 못한 아빠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