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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2. 옆구리 혹

어느새 혹이 떨어진 자리가 아물어가고 그리움만 달려 있다.

by 물가에 앉는 마음

교통요지인 선릉역 근처에 근무했을 때, 업무와 직,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오가는 손님들이 여럿 되었다. 퇴직선배들이 근처에서 당구모임을 하기로 했다며 ‘위수지역’에 진입했으니 신고한다는 전화가 왔다. 당구비를 계산해 드리기 위해 부지런히 가서 보니 신입사원 때 모셨던 선배님과 롤 모델이셨던 선배님도 계시고 비슷한 시기에 근무했던 선배님도 계시다. 현직에 계실 때 놀지 않고 업무만 열심히 했는지 당구실력은 중급자 이하지만 입으로 하는 당구실력은 고점자 들이다.

이제는 모두 시니어가 되어 경로우대 지하철을 타고 와 시니어할인 당구장에서 저녁내기 당구 치며 하루를 즐긴다. 가만히 지켜보니 학창 시절 친구들과 자장면내기 당구 치던 내 모습과 흡사해 절로 웃음이 난다. 상대방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기 위해 말을 걸고 실수하면 좋아하는 모습에 회춘 내지 나이 들면 도로 애가 된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하다.

‘경로우대 사상’만 투철하고 ‘경로우대 할인’이 드물었던 시절, 해외 출장 갔을 때 곳곳에 붙어있는 ‘시니어 디스카운트’ 표지판을 신기하고도 부럽게 쳐다봤었다. 우리나라도 이제 곳곳에 시니어할인 표지판이 붙어 있어 음식 값도 깎아주고, 유료낚시터 비용도 할인되며, 당구비는 반값 정도다. 머리 허연 선배들의 유쾌한 놀이를 보니 머지않은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듯하다.


서울로 출장 왔다가 기차 타기 전 잠깐 들러 얼굴을 보고 가는 후배들도 있다. 후배라고 해도 40 후반 또는 50 중반이다. 귀한 시간 쪼개 잊지 않고 찾아와 점심 먹고 차 한 잔 하고 가는 후배들이 고맙다. 현직에 있을 때도 손님이 찾아오면 순댓국을 자주 먹었다. 누가 돈을 내도 부담스럽지 않은 메뉴다. 마침 선릉에는 인근에서 제일 맛있다는 순댓국집이 있어 한 그릇하고 보내야 마음이 편하다.

후배들과의 대화는 주로 살아가며 생기는 사람과의 갈등과 풀리지 않는 업무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이제는 퇴직하고 시간이 흘러 내가 내놓는 처방에는 기술적 예리함이 떨어질 것이므로 말은 줄이고 귀담아듣는 시간은 늘렸다. 답답함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상대방이 있는 것만 해도 커다란 위안이 된다. 또한 업무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풀리지 않는 업무 이야기 裏面(이면)에는 ‘사람’이 관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는 예나 지금이나 풀기 어려운 주제이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나이 든 사람 조언이 효과 있는 경우가 있다.


가끔 사무실에 들르는 선배는 직장 선배이자 인생선배이기도 하다. 정이 넘쳐 타인의 아픔에 눈물을 보이기도 하고 이타적 성격이라 후배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끊임없이 찾고 후배들 고민거리를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생각해 보니 그 선배는 현직에 있을 때도 비슷했기에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둘이 만나면 가급적 회사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퇴직하고 오랜 시간이 흘렸지만 회사에 대한 사랑이 누구보다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회사이야기를 꺼내면 너무 진지한 토의가 되기에 의도적으로 살아가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어머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하신 후 점차 기력을 잃어가고 계셔서 걱정이 태산이었던 즈음 넌지시 한마디 던지신다. ‘불경스러운 이야기지만 병석에 오래 계셨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옆구리에 붙었던 커다란 혹이 떨어진 것 같다고 한다.’

‘그럴 리가요?’ 했지만 돌아가신 후 깨달았다. 입원하시기 전 간병도 쉽지 않았다. 낙상으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을 때는 몸은 불편해도 살아만 돌아오시라 기도했다. 고령에도 뇌수술과 고관절, 척추수술을 용케 이겨내시고 중환자실에서 나오셨다. 재활치료를 위해 요양병원 입원수속 하면서 마음이 편해졌나 하면 그렇지 않았다. 요양병원에서 무사히 나오실 수 있을까? 재활지료에 성공하실까? 선배의 표현대로 옆구리에 붙은 커다란 혹처럼 마음이 불편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기력이 떨어지신다는 소식에 재활치료를 선택한 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는지 혼란스러웠었다. 돌아가신 후 한동안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생각해 보니 딱 맞는 표현이었다. 편한 곳으로 가셨다고, 고통 없는 곳으로 보내드렸다고 생각하면서부터 불편했던 커다란 혹이 작아지기 시작했다.

1주가 忌日(기일)이 빠르게 지나갔고 또 반년이 흘렀다. 어느새 혹이 떨어진 자리가 아물어가고 그리움만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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