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 가서 故人(고인)께 올리는 말씀이 있다.
아내와 산책 중 전화벨이 울렸다. 한동안 연락 없던 전 직장 동료 전화다. 2번째 직장 그만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취업의사를 묻는다. 퇴직 후 부가되는 지역 의료보험료 이야기도 꺼내며 회사에 적을 두고 있다가 출근할 상황이 되면 출근했으면 한단다. 나를 걱정하고 위하는 말이 틀림없으나 내키지 않았다. 배부른 이야기 같지만 재직 시 비슷한 가치를 공유한 적이 없었기에 그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당분간 아무 생각 없이 낚시하고 쉴 계획이라 했다. 살갑지 않은 말투를 느꼈는지 일주일 내에 답을 달라며 전화를 끊었다. 퇴직 전에도 근무여건이나 승격 관련 유, 불리를 따져본 기억이 없었기에 생각하는 방향이 맞는다면 월급이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전화했던 동료는 낯가림도 심하고 인간관계를 심하게 따지는 사람과 금전적 이야기만 하다가 통화를 마쳤다. 그래도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니 다행이다.
통화내용을 들은 아내가 나를 쳐다본다.
‘거기는 가지 않을 거야. 친하지도 않고 나하고는 code가 맞지 않아서 불편해. 당분간은 아무 생각 없이 낚시만 할 거야. 이렇게 쉬다 보면 일하고 싶은 날이 있겠지.’
‘빨리 직장 잡으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뭔가는 일이 있어야 빨리 늙지 않으니 아무 생각 없이 쉬는 것이 아니라 생각 있게 쉬라는 거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아내도 내색하고 있지 않지만 대책 없는 노는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빠의 퇴직에 대해 아이들이 은근히 걱정하는 것은 떨어져 살던 부부가 같이 살면 트러블이 많을까 봐 하는 걱정일 것이다.
나이 들면 양기가 입으로 몰린다 했던가. 반려견 데리고 산책하면서도 입은 쉬지 않는 듯하다.
'여기는 처음 와 보는 곳이네.(아파트 단지 내 샛길)'
'어머나, 기가 막혀. 20년을 살았는데 처음 와본다고?'
'그렇지, 나는 다녔던 길로만 다니니까.'
'다른 건 잘하는데 길 찾는 것과 부피 가늠하는 것은 정말 못해.'
'부인 험담하는 것도 못하지!, 아 그것은 잘하는 거네.'
'그렇지 그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대한민국 1등이야.'
'당신한테 배웠나 봐.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시간이 갈수록 실력이 늘어.'
저기압인 날에는 이런 시답지 않은 농담으로 인해 다툴 수 있으니 아이들이 걱정할 만하다.
속으로도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김정운교수가 지적한 문제다. 기러기생활을 하느라 아내는 아이들 교육과 가정경제를 책임졌고, 나름 사회생활반경을 구축하고 있다. 어느 날 퇴직한 남편이 허락도 받지 않고 아내 영역에 불쑥 들어온 상황이다.
아내와 생활방식은 다르지만 매일 대면하며, 하루 세끼 식사, 탄천변 산책, 영화, 차 마시다 보니 접점의 시간이 늘었다. 아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려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한국에서 대기업 사장으로 명예롭게 은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해외지사, 지방공장 등 정열적으로 일하던 시절의 대부분을 밖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은퇴하는 날 불현듯 아내 생각이 났다. 아이들이 훌륭하게 자라 각각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고 존경받으며 은퇴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 덕분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내 이제부터는 아내를 위해 살리라”
그는 매일같이 아내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자 애썼다. 백화점에서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우아한 호텔에서 식사를 했다. 해외 골프여행, 크루즈여행을 다녔고 주말이면 아내가 다니는 교회에 나가 구석에서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었고 아내의 존재가 즐겁고 감사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딱 3개월 후 아침 식탁에서 아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당신, 이젠 제발 혼자 나가 놀 수 없어?”
-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김 정운著, 쌤앤파커스刊) -
교회에서 仲保祈禱(중보기도)하듯 요즈음 강아지 엄마들과 아내 친구들이 단체로 걱정하고 있다. 백수남편 때문에 강아지 엄마 모임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 모두 ‘콜라아빠’가 job을 잡아야 할 텐데 라며 걱정하고, 코로나 거리 두기가 완화되며 자주 얼굴을 봐야 하는 아내 친구들도 내가 job을 구했으면 한단다.
아내와 콜라 덕분에 여성분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낚시하다가 할 것이 없으면 분당에서 국회의원 나가는 것을 고려해야겠다. 현재 국회의원이 안 철수씨인데 내년 선거에 나오려나?
백수경력으로 따지면 5~6년 선배도 햇병아리 백수에게 낚시여행이 끝나면 사람 만나는 일을 했으면 한다고 권고한다. 갖고 있는 재능을 묵히는 것도 아깝지만 사람 만나는 일을 멀리하기 시작하면 사회적인 외톨이가 되기 십상이란다. 현역이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인간관계가 좁아졌지만 어느 정도 교류의 폭을 유지해야 한단다.
여러 사람들 걱정에 동의한다. 내성적 성격이라 먼저 다가가는 법이 없기에 새로운 그룹을 만나는 경우는 좀처럼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그룹과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잠시 잠수 타서 사람들 세상과 멀어지려는 것일 뿐 산속이나 물가에서 오랜 기간 은둔할 생각은 없다. 충분히 놀았다고 생각할 때가 되면 인간계로 복귀해야 한다.
조문 가서 故人(고인)께 올리는 말씀이 있다. ‘이제는 근심, 걱정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십시오.’라고. 하지만 왜 故人만 근심, 걱정 없이 편히 쉬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살아생전 잠시라도 그렇게 쉬면 안 되는 것인지? 안되면 가불이라도 해서 편히 쉬려 한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번민이기에 작정해서 쉬기 전에는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따져보니 마음 편히 쉰 지 고작 1달여밖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