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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마지막과 시작

‘마지막’이라는 표현에는 슬픔이 아니라 아쉬움

by 물가에 앉는 마음

사소한 것이라도 ‘마지막’이란 단어가 붙으면 슬픔과 아쉬움이 담겨있다. 노래 가사지만 ‘10월의 마지막 밤’에는 哀愁와 쓸쓸함이 담겨 있는 듯하다. 어제나 오늘이나 똑 같이 24시간인데 10월 30일과 11월 1일에는 차이는 있는 듯하고 12월 31일과 1월 1일은 의미조차 다르다. 어쩌면 ‘마지막’이라는 표현에는 슬픔이 아니라 아쉬움으로 눈물이 배어 나오는지 모르겠다.

조직개편과 인사이동으로 새로운 부서를 맡게 되었는데 내게 기술개발실이란 어쩌면 nostalgia(鄕愁)인지 모른다. 직원 때부터 처장 때까지 지방으로 몇 번의 전근이 있었지만 본사로 전근 올 때는 연어가 고향 찾아오듯 기술개발실 주변을 맴돌기만 했다. 이번 인사이동에 더욱 아쉬움이 남는 것은 기술실이 마지막이라는 생각과 좋았던 기억, 좋았던 사람들에 대한 향수이고 아직도 못다 한 업무에 대한 아쉬움인지 모르겠다.

아쉬움이 많지만 기술개발실에서 내가 그렸던 기술회사로서의 밑그림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는 안도와 잔소리만 듣던 신입직원과 전입직원들이 어느덧 성장하여 한몫해내는 대견한 모습에 위안 삼아야 한다. 하지만 한동안 느껴야 하는 향수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연어가 갖고 있는 선천적인 질병이다. 그나마 새로 담당하는 전력사업처가 기술개발실 옆이니 창문 밖을 멍하니 쳐다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새 출발은 항상 마음이 설렌다. 물론 신설조직이니 헤쳐 나가야 할 난관이 당연히 많겠지만 집기도 새것일 테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새로운 사람들이다. 게다가 회사에서 내어 주기로 한 신축오피스텔까지 모든 것이 새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다.

따지고 보니 이번이 5번째 시운전이다. 고리 3,4호기 울진 3,4호기 영광 5,6호기 시운전을 했으니 원자력발전소 시운전 전문요원인 셈이다. 한편에서는 마무리 공사를 하느라 먼지가 풀풀 날리지만 새로 설치된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시운전사업소의 업무가 좋았다.

쓰러져가는 기술개발실을 맡아 바로 세운 것을 보고 직원들이 조직의 시운전을 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신설조직을 맡게 되었으니 다섯 번째 시운전이다.


근 30년을 원자력 관련 업무를 해왔기에 전기공학을 전공했어도 송전선점검, 철탑건설, 지중선점검업무는 아직 생소하다, 부지런하게 공부해야 하는데 굳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지 의문이지만 빠르게 달려가기보다는 차근차근 같이 가는 것이 현명한 방법임을 알고 있다.

산하 6개 지사, 38개 출장소의 식구들이 533명이고 담당하는 송전선로 길이는 13,195Km로 한국에서 미국까지의 거리가 될듯하다. 종편채널의 프로그램인 ‘극한작업’에서 방영한 적이 있을 정도로 작업조건은 열악하고 위험하다. 서커스 곡예 하듯 까마득하게 높은 철탑에 매달려 작업하는 직원들을 추락과 감전사고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것이 첫 번째 미션이고 국가의 신경망인 선로고장을 예방하여 정전사고를 줄이는 것이 두 번째 미션이다. 안전사고와 선로고장 예방을 바탕으로 신사업을 개척하는 순서가 맞을 듯하다.


고객사 처장님은 한전 박 처장님 이시다. 서울대에서 CEO과정을 수강했을 때 짝꿍이셨던 박 처장님은 주 고객이 되었으니 잘 모셔야 한다. 그림 그리는 재주가 없어 CEO과정 동기생 모두를 글로 케리커쳐 한 적이 있었는데 박처장님에 대한 묘사를 새삼스레 다시 읽어보았다.

부산아저씨 박 처장님은 교육기간 내내 넉넉함과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으셨다. 시간이 좀 더 있었으면 X談, Y談을 무궁무진하게 들을 수 있었을 듯하다. 향후 모임에서는 항상 박처장님 옆에 앉으려 한다. 옆자리 미리 ‘찜’

짝꿍이셨던 박 처장님은 이번 인사이동으로 헤어지게 될 것 같다. 아쉽다. 박 처장님과의 교류는 계속되겠지만 업무적으로 ‘시작’과 동시에 ‘마지막’이 될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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