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 이제부터 늦가을까지 노부부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포근한 날 다 보내고 시베리아기단이 한반도를 강타한 날 작은아이 직장 친구가 보름일정으로 놀러 왔다. 재택근무 끝내고 휴가를 얻은 작은아이와 함께 한국을 체험하다 네덜란드로 돌아간단다. 분당은 영하 18도, 대서양과 접해있는 네덜란드는 북위 52도로 우리나라에 비해 북쪽에 위치해 있지만 대서양 난류 덕에 겨울 평균기온이 2도로 높다. 갑작스러운 한파에 옷이 부실할 것 같아 겨울용 重(중)파카를 빌려줬다.
네덜란드인 보통키인 183Cm에 호리호리한 체격의 친구는 반려견도 보고 싶고 부모님도 뵙고 싶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한국 정서로는 구혼 내지 혼인 승낙을 받는 단계라 살짝 긴장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문화는 그렇지 않고 작은아이도 평범한 회사 친구일 뿐이라 한다. 아무튼 작은 아이는 친구와 함께 놀러 다녀야 하니 운전연수도 받고 친구를 위한 일정인지 본인을 위한 일정인지 불분명한 휴가 계획을 만들었다.
서울과 경기도 일원 유명 맛집과 카페순례는 친구도 원했을 터이나 메뉴가 의심스럽다. 한우 구이, 일식 오마카세, 어복쟁반, 평양냉면, 광장시장 빈대떡, 육회. 떡볶이, 호떡과 가락동시장 횟집에서는 개불도 먹었단다.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약수동 삼겹살, 족발, 대창 등 메뉴가 버라이어티 한데 아마도 작은 아이가 평소 먹고 싶었던 음식 비중이 높아 보이기도 하다.
친구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입맛이 까다롭지도 않은 듯하다. 젊은 세대들도 호불호가 갈리는 슴슴한 맛의 평양냉면도 맛있었다 하고 어복쟁반도 맛있게 먹었다고 한다. 돼지껍데기와 육회도 먹었으며 산 낙지는 작은아이가 아닌 친구가 경험해보고 싶었던 위시리스트 중의 하나였단다. 좀처럼 ‘나쁘다.’ 소리를 하지 않는 외국인 언어 습관을 감안해도 친구 입맛이 까다롭지 않고, 착하니까 권하는 음식을 잘 먹는 것이 아닐까?
반려견 ‘콜라’를 끔찍이 사랑하는 작은아이가 친구와 매일 콜라를 산책시킨다고 했다. 본인을 위한 일정인 것이 분명해 아내가 반대했다. ‘얘, 멀리 네덜란드에서 왔는데 매일 콜라 데리고 공원 산책하자고 하면 좋아하겠니?’, ‘걔는 네덜란드 사람이라 싫으면 싫다고 해요. 친구가 좋다고 했어요.’ 아내가 산책 횟수를 줄였다.
작은 아이 성화로 반려견이 너무 어릴 때 입양했다. ‘분리불안증’이 있으며 까칠한 성격의 콜라는 경계심도 많아 식구 이외에는 요란하게 짓고 곁을 내주지 않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네덜란드 친구 손을 핥으며 친근감을 보였고 짓지도 않았다. 목줄을 건네받은 친구를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보기도 했으나 거부감 없이 따라다니며 공원을 산책했다.
집으로 초대해서 집밥을 대접한다 하기에 친구가 한국 도착하기 전부터 아내 고민이 시작되었다. 작은아이가 한국 음식자랑을 엄청했단다. ‘네덜란드는 음식값만 비싸고 맛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다. 심지어 한국 고구마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네덜란드는 고구마까지도 맛이 없다.’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친구에게 집밥뿐 아니라 한국고구마까지 대접해야 한다.
어떤 음식을 준비할까? 네덜란드는 굴이 비싸니 굴 한 포대 사고, 한우구이, 김치전, 잡채를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어느 날, 저녁 무렵 관광 일정이 변경되었다며 갑자기 집에 와서 저녁식사를 하겠다고 하여 당황했지만 순식간에 고민이 해결되었다. 명절 직후라 냉장고 파먹기를 하고 있어 식재료 없이 과일만 있었으며 시장 볼 시간조차 없었다.
친구 위시리스트 중 하나였던 허니콤보 프라이드치킨을 주문하고 집밥으로는 별다른 식재료가 필요 없는 일본식 메밀국수를 준비했다. 후식으로 나주 배, 감홍 사과, 한라봉, 황금향과 대봉 홍시, 수제 생강편을 냈다. 호기심 많은 친구는 무엇이든 잘 먹고 한국음식이 맛있단다. 김치를 좋아한다면서 김장 김치를 황홀한 표정으로 맛나게 먹더니 치킨과 메밀국수도 바닥냈다. 네덜란드에서 부사사과를 맛보았다는 친구는 나주 배, 감홍 사과, 한라봉, 황금향 맛에 감탄한다. 처음 먹어본다는 이질적 식감의 홍시도 먹었고 생강편을 맛보고는 놀라워했다. 식사량이 많은데 비해 몸집이 호리호리한 것이 의아하다.
신기하게도 네덜란드 친구는 태어나서 이발소를 가본 적이 없단다. 네덜란드에서는 집으로 출장 오는 아줌마에게 머리손질을 맡겼기에 이발소 가는 것도 위시리스트에 있었다. 두상이 작아서인지, K-이발소 컷팅기술이 좋아서인지 예쁘게 잘 잘랐다. 둥근 안경을 써서 해리포터 주인공 다니엘 래드클리프와 흡사하게 생긴 젊은 청춘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계획적이라 위시리스트가 빼곡한 것 같다.
작은아이는 재택근무 하고 라섹수술, 운전연수받느라 바빠서 한국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네덜란드 친구도 작은아이 친구 만나는데 동행하기로 했단다. 친구 만나 맛집과 카페에 가고 집으로 초대받아 뭉티기, 양무침, 꽁치밥(쌀에 학꽁치를 올려 밥을 한다는데 먹어보지 못했다. 작은아이 친구 남편 요리솜씨가 요리사급이다.)과 막걸리를 맛보았단다. 신세대들은 한 다리 건너 친구도 스스럼없이 만나고 어울린다.
눈 오는 경복궁은 더욱 운치 있었을듯하다. 친구는 한복 입고 관람하길 원했으나 너무 추워 한복은 입지 못했단다. 창경궁, 덕수궁 현대미술관, 인사동, 북촌을 둘러봤다. 광교에 와서는 큰 아이부부를 만나 손녀도 보고 한우구이 식사 후 호수공원 야경을 구경했다.
코엑스, 롯데월드, 에버랜드에 가서 위시리스트에 있는 판다를 구경하려면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강남에 있는 봉은사는 고층빌딩사이에 사찰이 있어 이색적이었다고 한다. 호기심 많은 친구는 광장시장, 남대문시장 등 재래시장은 구경했고 코스트코에도 가고 싶어 했다. 네덜란드는 유럽제품일색이기에 한국마켓을 구경하고 싶어 해 식구들과 장 보러 나섰다. 친구는 속내의, 세면기용 필터, 간식용 오징어스틱, 반찬용 김가루를 구입했다.
직장 근처에 부모님이 살고 계시나 독립해 혼자 사는 네덜란드 친구는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다. 작은아이에게 요리방법을 배워 육수용 멸치와 다시마, 참기름, 깨소금, 고춧가루 등을 사간다고 한다. 작은 아이도 가져가야 하는 품목이니 아내가 준비하는 듯하다. 작은아이에게 얻어먹은 밥맛이 좋다 하니 쌀도 챙겨줘야 한다.
아내가 인터넷 단골가게에 주문하지만 내 카드를 이용하는지 전화기에 연신 문자가 찍힌다. 참기름, 쌀, 생 와사비..., 이 정도 되면 친구나 손님이 아니라 아들이 새로 생겨 외국 내보내는 것 같다.
출국일이 가까워오자 큰 아이가 선물한 엿, 한과, 약과, 쇼핑한 물건과 주문한 물건이 쌓이기 시작했다. 갖고 갈 짐이 많아 걱정스러웠는데 출국전날 우리 집에 와서 진공압축기를 이용해 짐을 싸기로 했단다. 사라진 줄 알았던 집사람 일거리가 다시 생겼다. 半殼(반각) 굴, 새우, 가리비와 한우를 주문하고 잡채를 만들어 같이 저녁식사를 했다. 출국일이 가까워오자 네덜란드 친구가 손님이 아닌 식구처럼 친근해졌고 친구는 아내에게 엄마 같다고 한다.
친구는 손녀 장난감을 사 왔고 네덜란드와플 한 보따리와 아내 머플러, 내 지갑을 선물로 사 왔다. 선물도 받지 못한 콜라가 네덜란드 친구에게 호감을 보이자 아내는 외국인 사위를 맞을 가능성이 보인단다. 신기하게도 콜라는 같은 식구가 될 사람을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는 극도의 경계심을 나타내고 짖는데 큰 사위를 처음 봤을 때도 짖지 않고 애교를 부렸다. 서열 1위 콜라가 만족하다면 서열 5위인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작은아이와 친구사이 애정전선은 보이지 않는다.
보름간의 휴가를 끝낸 작은아이와 친구를 아내가 공항까지 바래다줬다. 친구는 조만간 뵙겠다며 공포스럽게 인사하고 갔지만 적어도 작은아이가 휴가 받고 귀국할 늦가을까지는 걱정 없다.
만세, 이제부터 늦가을까지 노부부의 휴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