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8. 5백 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2)

(최효찬著, 위즈덤하우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5. 창조적 파괴의 원조, 서계 박세당(시장 상황을 외면하는 주류들과 맞서다.)

‘斯文亂賊(사문난적)이야말로 창조적 파괴의 원조다.’ (斯文亂賊: 성리학에서 교리를 어지럽히고 사상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은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사대적 명분에 얽매인 주류들은 실용주의를 내건 윤휴, 박세당, 허균 등에게 ‘주홍글씨’의 낙인을 찍고 따돌림했다.

사문난적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뒤집은 ‘파괴적 창조자’였으나 삶은 불우했다. 박세당은 32세에 장원급제하여 엘리트코스를 밟았으나 숱한 상소를 올려 직언을 잘하는 사람으로 평이 났다. 40세 때 스스로 관직을 접고 학문에만 힘을 썼으나 조정에서 관직을 맡아 달라는 청을 뿌리쳤다. 두 아들도 직언을 굽히지 않아 처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할아버지부터 아들까지 급제하였으나 시대와의 불화로 모두 유배를 당했으나 이들의 혁신사상은 조선후기 실학사상으로 계승되었다.


6. 명분에 모든 것을 건, 청음 김상헌 (먼저 명분에 포지셔닝한 뒤에 실리를 추구하라)

병자호란 때 조정은 전력은 약세이지만 청과의 전쟁을 불사하자는 척화파와 굴욕을 하더라도 화친을 해야 한다는 주화파로 양분되었다. 임금이 주화파의 손을 들어주어 주화파가 승리를 했지만 전쟁 후에는 당장의 살길을 찾느라 굴욕을 자초했다는 비난에 직면해 항상 떳떳하지 못했다. 주화파는 권력의 주류였으나 국가의 자존심을 강조한 척화파가 선명성 경쟁에서 항상 우위에 서게 되었다. 결국 주화파는 현실에서는 주류가 되었지만 역사에서는 淸流(청류: 명분과 절의를 지키는 깨끗한 사람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대접받지 못했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국왕 앞에서 국왕의 명에 따라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었던 청류이다. 이것은 조선의 정치세계를 지배한 명분의 힘이었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이 명을 치기 위해 조선의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김상헌이 이를 반대하였고 청은 71세의 김상헌을 압송하였고 살아 귀국하여 83세에 숨을 거두었다.

주류 간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명분은 항상 최고의 무기가 된다. 헤게모니 싸움에서 패배해도 명분이 있다면 결코 패한 것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패배해도 장기적으로는 승리를 안겨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죽은 자에 대한 사후평가인 졸기가 실리는데 퇴계 이황은 120자, 율곡 이이는 3444자, 최명길의 졸기는 6915자였다. 일시적인 죽음보다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한 김상헌은 주류 위의 청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실리에 먼저 포지셔닝하면 ‘명분’을 만회하기 어렵다.

단일가문에서 250년이란 짧은 시간에 136명의 문과 합격자 15명의 정승배출의 신기록을 세운 조선 후기 명문가 안동 김 씨 가문은 김상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7. 조선 제일의 헤드 헌터, 우복 정경세(미래에 대한 최상의 보험은 사람이다.)

요즈음에는 ‘사윗감 하나 잘 고르면 인생역전이 따로 없다.’지만 조선 중기 이후 당쟁이 극심해지면서 ‘사윗감 하나 잘못 고르면 멸문지화를 당한다.’는 말이 현실화되었다. 당파가 다르면 죽고 죽임을 당하는 정치판에서 결혼은 대부분 당파와 당색의 카테고리 범주를 벋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당파와 당색이 다른 사윗감을 골라 조정을 발칵 뒤집은 이가 남인의 영수이자 학자인 우복 정경세였다. 우복은 조선시대의 몇 안 되는 헤드헌터였다. 우복의 스승은 서애 유성룡이었는데 서애는 무명의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했으니 그 스승에 그 제자였던 셈이다. 우복의 사위인 송준길은 노론의 영수이자 대사헌을 지낸 대학자이다. 송준길 또한 계파를 뛰어넘는 횡보를 보여 노론의 반대파 영수인 이황을 평생스승으로 모셨다.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으니 조선시대 상황에서는 장인과 사위는 적대적 관계였지만 우복은 중용, 화합의 리더십을 보여줬으며 다른 가문에 비해 정치적 외풍을 덜 받았다.


8. 시대를 앞서 간 실용주의 가풍, 명재 윤증(400년 전에 경영학을 가르치다)

명재가문은 400년 전에 학교를 만들어 ‘경영학’을 가르쳤다. 명분이 지배하던 조선에서 실리를 추구했다. 정승과 판중추부사로 제수받고 사직 상소를 올린 것이 27번이나 되고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아 ‘백의정승’으로 불린다.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실용주의를 진작시키기 위해 ‘理財’를 교육했다는 것이 파격이다. 1628년에 宗學堂을 만들어 내외척, 처가등 3족의 자제를 모아 과거를 준비시켰다. 논산의 파평 윤 씨가 명문가로 우뚝 선 것은 종학당의 힘이었다. 조선시대 통틀어 전주 이 씨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과거 합격자인 419명(전주 이씨769명)을 배출했는데 종학당 출신은 42명에 이른다. 빈민구제기관인 사창을 만들어 재해, 환란을 맞은 지역민을 도왔는데 이는 평소 공동으로 재원을 마련했다가 서로 돕고자 만든 것으로 운영 규약을 보면 ‘기획의 달인’이었다. 또한 검소하면서도 실용적 가풍을 조목조목 명문화한 ‘戒諸子書’를 남겼는데 이를 어기는 자는 집안에서 쫓아내라고 적혀있다.


9. 조선을 구한 선비, 제봉 고경명(몸을 던지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전남 담양 창평의 집성촌인 산천마을과 유천마을은 들판을 마주 보고 있는데 400년간 서로를 보듬어주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왔다. 임진왜란 때 순국한 고경명의 후손들이다. 유천마을은 임진왜란부터 한말까지 이어진 의병운동의 산실이었고 삼천마을은 근대 신교육운동의 발원지였다. 고경명은 임란 최초의 의병장이었고 아들인 학봉 고인후부터 13대손 고광순, 일가인 고광훈, 고광채, 고광문, 고제량 등도 나서 의병의 맥이 이어졌다.

삼천마을에서 신교육을 주도한 사람은 학봉의 10대손인 고정주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낙향하여 창흥의숙을 설립 하여 교육운동을 시작한 고정주는 동아일보 창업주 인촌 김인수의 장인이다. 창평 고씨의 후예들은 한 손엔 칼, 한 손엔 펜을 들고 국가적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외면하지 않은 문무를 겸비한 흔치 않은 가문이었다.


10. 500년을 이어온 ‘제일’ 정신, 저헌 이석형(겸손이야말로 조선 최고 명문가의 원천이다.)

조선시대 도공 우명옥은 스승도 만들지 못한 설백자기를 만들어 명성을 얻게 된 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서야 스승을 찾아와 잘못을 뉘우치고 戒盈杯(계영배)라는 잔을 만들었다. 계영배는 술이 일정 수준으로 차오르면 새어 나가도록 만든 잔으로 거상 임상옥이 갖게 되었는데 늘 곁에 두어 과욕을 다스리면서 큰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한 가문에서 인재를 배출하고 권력을 얻게 되면 존경받는 가문이 되느냐, 이기주의에 빠져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가문이 되느냐에 따라 가문의 격이 달라진다. 조선중기부터 조선 최고의 文衡(문형: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 대제학의 별칭)을 배출한 가문 가운데 연안 이 씨가 자리하고 있는데 학문의 권위만 높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관직이 아니다. 문형은 급제자 중 왕이 선발하여 공부를 시키는 ‘호당’ 출신만이 오를 수 있는 자리로 국왕장학생이 되어야 했는데 연안 이 씨 가문에서는 호당장학생을 10명이나 배출했다. 연안 이 씨는 250명의 문과 합격자를 내어 9명의 정승과 대제학 8명 청백리 7명을 배출했고 판서는 54명이나 되었다. 그 출발은 저헌 이석형으로부터 시작되었는데 저헌은 27세에 생원, 진사시,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세종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은 놀라게 한 인물로 세종은 저헌을 중용했고 문종, 단종, 세조, 성종 등 다섯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이석형가문의 지향점은 戒溢(계일: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로 후손들이 수많은 벼슬자리에 올랐어도 탐관오리가 없고 청백리가 넘치는 가문으로 설 수 있었다. 자신의 집에도 ‘계일정’이라는 정자를 만들어 부귀영화가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후손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는데 후손들은 ‘계일정신 문화원’을 건립하고 1988년 앞마당에 ‘계일정’을 지었으니 무려 600년 넘게 ‘넘침’을 경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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