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5백 년 명문가, 지속경영의 비밀(1)

(최효찬著, 위즈덤하우스刊)

by 물가에 앉는 마음

‘5백 년 명문가...’라 하니 별것 아닌 것 같아도 ‘5백 년’은 긴 세월이며, 나라나 가문이 500년을 지속한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신라역사는 천년이며 조선은 500년 세월을 버텼다. 조선 왕조가 500년을 지속한 밑바탕에는 성리학이라는 윤리질서가 있었고, 로마제국 1500년에는 스토아철학이 있었다. 한나라는 유교가 통치철학으로 400년을 버텼다. 참고로 송나라는 300년 정도(960년-1279년), 요나라 200년(916년-1125년), 금나라 100년(1115년-1234년), 원나라 100년(1271년-1368년), 명나라 300년(1368년-1644년), 청나라 300년(1616년-1912년)이었다. 흔히 부자는 3대를 못 간다 했는데 경주 최부자는 12대 400년간 부를 지속하여 화제가 되었다. 지금부터 5백 년 명문가의 철학과 질서, 윤리 등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 보겠다.


남성은 목표를 중시하고 여성은 관계를 중시한다. 조선 명문가를 만든 이들을 보면 여성형 야망가였다. 분명 그들에게도 야망은 있었으나 야망을 가문이나 국가에 우선적으로 바쳤다. 더불어 차세대 후계자들이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틀을 갖추게 했지 명성, 부, 아첨, 권력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았다. 이는 미국의 경영학자 짐 콜린스의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 나오는 마지막단계 리더십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이미 500년 전 좋은 가문이 아닌 위대한 가문을 추구하고 있었다. 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관계 지향적 여성성과 목표 지향적 남성성을 조화롭게 갖춰야만 위대한 가문/기업이 될 수 있다.


1. 가문 경영의 최고수, 청계 김진(500년 전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기획의 달인)


의성 김 씨 청계 김진은 과거공부를 해서 사마시에 합격하여 대과를 보러 한양으로 가던 중 관상 보는 사람이 ‘생참판보다는 증판서가 되는 것이 낫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식들을 공부시키기로 했다. (생참판: 대과에 합격해야 오를 수 있는 관직, 증판서: 자식이 과거에 합격 후 고위직에 오를 경우 아버지에게 주는 벼슬) 47세에 아내를 잃은 청계는 자식교육을 위해 재혼을 하지 않았으며 서당을 열어 고을의 소년들을 모아 후학을 양성했다. 5형제가 장성하자 퇴계문하로 보내 교육을 시켜, 결국 5 아들 모두가 과거에 합격하여 五子登科宅(오자등과택)으로 유명해지는 등 퇴계의 가문과 쌍벽을 이루는 명문가로 만들었다.

대부분의 종택들이 동학혁명이나 해방 후 좌우익의 대결로 인해 불에 타 없어졌지만 김진과 그의 후손들의 종택 6곳 모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는 지역민들에게 존경받았음을 의미한다. 원칙과 신념을 견지하고 호연지기로 자녀교육과 가문경영에 임해 정의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버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일제 강점기에 후손들에게서 재현되었다. 청계의 후손 중 독립운동으로 훈, 포장을 받은 이가 38명이나 되었다.


2. 조선의 으뜸가는 역할 모델, 백사 이항복(자수성가형 인재는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미국에 청교도 정신이 있다면 조선에는 청백리 정신이 있다. 미국사회에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이 많지만 청교도 윤리를 실천하는 기업가, 정치가, 종교인등이 그나마 사회를 정화시켜 미국이 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청백리는 조선의 국가적 역할 모델이었을 뿐 아니라 가문의 역할 모델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가 조정의 벼슬아치가 되는 유일한 길이었으나 길은 무척 좁았다. 하지만 청백리로 뽑히면 음직(아버지, 할아버지께서 청백리였다면 자손에게 과거 없이 내리는 관직)을 주었다. 청백리는 조선 공직자에게는 최고의 지도자상이고 최고의 역할 모델이었으며 조선 역사를 지탱해 온 보이지 않는 힘으로 백사는 조선선비뿐 아니라 경주 이 씨 씨 후손들에게 외고의 역할 모델이었다.

백사의 가문은 역사의 국난기에 두 번이나 인재를 배출한 가문으로 임진왜란 때 병조판서, 영의정을 역임한 백사, 300년 후 일제 강점기 이희영은 국난극복에 앞장서며 가문의 영광을 재현했다.


형조판서를 지낸 아버지가 9세 때, 어머니는 16세 때 돌아가셔서 4남 3녀 형제들은 흩어져 살았고 백사는 독학으로 공부한 ‘자수성가형’ 인재였다. 혈혈단신으로 남들이 주는 것을 받아먹고 자랐지만 총명했기에 당시 영의정인 권철이 손녀사윗감으로 발탁했다. 백사는 25세에 과거시험 4등으로 급제했고 장인 권율은 백사보다 2년 늦은 46세에 급제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는 총 291명으로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이항복, 김장생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백사의 가문에서는 4명의 영의정 1명의 좌의정, 8대째 판서를 배출한 대기록을 세웠다. 백사는 말년에 인목대비 유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광해군은 중풍으로 고생하던 백사를 북청으로 유배를 보냈고 백사는 그곳에서 죽음을 맞았다. 후손인 우당 이희영의 형제들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통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참여형 명가가 되었다. 이희영의 6형제 중 유일하게 살아 돌아온 이는 이승만 정권에서 부통령을 지낸 성재 이 시영이다.


3. 자녀 교육에 올인한, 가정 류봉시(인재 산실을 만든 무명의 가문 기획자)

안동 전주 류 씨의 옛날 외갓집은 의성 김 씨 청계 김진 가문으로 청계가 세상을 떠난 지금까지 400년 이상을 대구포를 싸들고 외가 제삿날을 챙긴다. 전주 류 씨 집안은 학문(문학, 역사, 철학)과 詩書畵에 능해 학자와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청계가문과의 교류에 의해 가풍을 정립한 것이다. 강릉 판관을 지낸 류성이 청계의 사위로 청계가문의 사회 경제적 기반 위에서 안동의 명문가가 되는 기반이 되었다. 류성의 5대손인 류봉시는 초야에 은둔한 처사였지만 두 아들을 위해 분가를 하여 서재를 짓고 가죽나무를 심었다. 가죽나무는 회초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두 아들은 과거에 급제를 했고 분가를 하였으며 자손들은 문집을 낸 사람이 100여 명에 900여 권의 문집을 냈다. 류봉시 가문은 미래를 도모하기 위해 둥지를 떠나듯 분가에 분가를 거치면서 명문가로 탄생하게 되었다.



4. 조선 최고의 어머니 CEO, 고성 이 씨 부인(‘서지약봉’이라는 명문가 브랜드를 만들다.)

약봉 서성은 조선시대 행정의 달인으로 5도 감사를 지냈고 이조판서를 제외한 판서를 두루 지낸 후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그의 가문에서는 정승 8명, 대제학 6명, 당상관 28명, 정 2품 이상 34명, 종 2품 이상 15명에 6대째 정승, 대제학 등 고위직을 배출했고 문과 합격자 105명을 배출한 명문가이다.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자 세간에서는 ‘서지약봉 홍지모당’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는데 서 씨 가운데에는 약봉이 유명하고, 홍 씨 가운데에는 모당(홍이상)이 유명하다는 의미이다. 후손들에게서 3대 정승과 3대 대제학이 배출되었는데 이는 조선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이 씨 부인은 장님이었다. 어릴 적 부자탕으로 세안을 하다가 시력을 잃었다. 신랑감 서해는 이를 모르고 신부 집으로 가던 중 신랑일행이 장님이니 즉시 파혼하고 돌아가자 했으나 내가 돌아가게 되면 소문이 나서 그 규수는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한다며 혼인을 강행하였다. 남편 서해는 퇴계의 후계자로 내정될 정도로 뛰어났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3년상을 마친 이 씨 부인은 아들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거처를 옮겼다. 약현이란 동네에 대지 5천 평 규모의 집을 짓자 주위에서 규모를 줄일 것을 권고했으나 이 씨 부인은 지금은 크나 몇십 년 지나지 않아 좁게 될 것이라 했다. 이 씨 부인은 약봉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 집어넣어 소위 큰 물에서 자식을 키웠다. 과거에 급제하여 핵심인재로 우뚝 선 약봉은 ‘아이들을 잘 가르치고 부지런히 글을 읽고 선을 행하게 하라는 勿怠爲善(물태위선)’을 가훈으로 삼았다. 이 씨 부인이 집을 지은 것은 결단과 도전의 의미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337. 새기고 싶은 명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