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대책 없이 논다. 無心無慾
두 번째 직장 퇴직 즈음, 선후배님들이 굳이 사무실 근처로 찾아와 퇴임송별식을 해야 한단다. 벌써 두 차례 행사가 있었고 두 차례가 계획되어 있다. 2년밖에 근무하지 않았지만 핑곗거리가 생겼으니 얼굴 보자는 의미다.
선후배님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퇴직 후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남도에 내려가 한동안 낚시하려 합니다.’ 물어본 의도에 맞는 답은 아니다. 호구지책에 대해 물어본 것인데 엉뚱하게 취미생활을 하겠다고 대답했다. ‘못 다한 글쓰기를 하려 합니다.’라는 대답도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것이다.
두 번째 직장 퇴직 소감을 물었다. 짧은 기간이라도 정들었으니 섭섭한 느낌도 있으나 시원함이 앞선다. 첫 직장부터 따져보면 38년 근무하다 퇴직했으니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생각이 앞서는 듯하다. 목숨 걸다시피 다녔던 첫 직장에 비해 두 번째 직장은 매우 자유롭게 다녔다. 하지만 월급 받는 일은 보이지 않는 족쇄로 인해 정신적으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정말로 시원하고 후련하다.
* 이것은 핑계일지 모른다. 샐러리맨이나 사장이나 모두 스트레스를 받는다. 경제적인 면과 인간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 비중만 다를 뿐이다. 사람은 죽기 전까지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고민한다.
당분간 취미생활을 하겠다고 한 것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서가 아니라 오랜 직장생활 후 퇴직했으나 충분한 휴식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선후배님들이 향후 거취에 대해 궁금해하는 것도 당장의 끼니걱정 때문이 아니다. 너무 오랜 휴식기는 사회적인 생활을 단절하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 간단한 일거리라도 만들라는 주문이다.
사실 한꺼번에 두 가지를 하지 못한다. 퇴직 전까지는 회사 다니는 것에만 집중하고 퇴직 후에 ‘무엇을 할까?’ 생각하면 된다. 딱히 정해놓은 길은 없지만 길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는다. 생각이 길어질 수도 있고 짧아질 수도 있다.
퇴직하면서 명함 하나 만들었다. 새롭게 만나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테지만 혹시 전화번호를 주고받으려면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 백수명함을 한 장 만들었다. 소속, 직책, 직위 등이 거추장스럽게 매달렸던 명함에서 브런치 작가명이 간결하게 인쇄된 깨끗한 명함으로 바꿨다. 여백이 많아 눈이 시원하고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느낌이다.
퇴직 후 새벽에 일어나면 무엇을 할까? 아니 새벽같이 일어날 필요가 있을까? 머리 맑게 하고 살기로 했으니 이런 생각조차 할 필요 없다. 출근할 일 없으니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면 된다. 몇십 년 동안 칸트처럼 생활하던 습관이 쉽게 고쳐지지는 않을 것이지만 할 일도 없는데 일찍 일어나 우두커니 앉아 있는 것도 우습기는 하다.
백수 첫날, 어김없이 5시에 일어났다. 노트북을 켜고 브런치에 글을 올리고, 끄적거리던 원고를 이어서 쓴다. 출근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다른 일을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마음은 벌써 ‘백수’를 받아들인 듯하다. 반려견과 산책 가서 벚꽃, 할미꽃 구경하고 숲 속에서 딱따구리 소리도 들었다. 미뤄두었던 자동차 리콜 예약, 낮잠도 자고 빈둥대며 삼시 세끼 먹었다. 세상도 순리대로 돌아가고 평화로웠다.
평생 계획 속에 묻혀 사느라 계획이 없으면 불안했었지만 오늘 계획뿐 아니라 향후 계획이 전혀 없어도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으니 ‘백수’가 체질에 맞는지도 모른다. 무계획도 살만하다.
계획 비슷한 것이 한두 가지 있기는 하다. 지인과 남도로 낚시여행을 가기로 했다. 낚싯대 던져놓고 앞으로 ‘무엇을 할까?’ 생각하려 한다. 이 또한 생각나지 않아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뜻한 봄볕 받으며 졸아도 그만이고 찌가 올라와도 그만이다.
통영 한 달 살기를 해볼까도 구상 중이다. 통영은 예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한두 번 정도 스쳐 지나간 수준이나 이번에는 오래 묵으려 한다. 좋아하는 어시장이 있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시장구경만 해도 한 달은 버틸 것 같다. 주변 민물낚시터와 조황에 대한 자료수집이 완료되면 시도해보려 한다. 그러나 생각해 놓은 두 가지도 당장 해야 할 일은 아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백수의 시간을 즐겨야 할 때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참으로 대책 없이 논다.’ 이야기할지 모르겠다. 당분간은 ‘무엇을 할까? 조차도 머리에서 지우기로 했는데 잘 될지는 미지수다. 아무튼 대한민국에서 백수로 살기, 첫발을 내디뎠다. 편한 마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無心無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