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도 주제가 ‘행복’이라 했습니다.
2021년 첫 번째 편지를 띄우며 작년과 마찬가지로 2021년도 주제가 ‘행복’이라 했습니다. 일상에서 ‘행복’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하지만 알듯 모를 듯, 손에 잡힐 듯 말듯, 옆에 있는 듯 아닌 듯, 쉬운 듯 어려운 듯한 단어이기도 하며 어쩌면 죽기 전까지 계속 쫒아 다녀야만 하는 파랑새 같은 주제일지 모릅니다. ‘행복’이 아닌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오늘은 올해의 주제였던 ‘행복’이야기를 하며 저물어 가는 한해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람의 행복과 불행은 관 뚜껑을 덮기 전까지 모른다.’ 행복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무엇이 행복인지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인생이라는 일본 속담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하고 공부했지만 행복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행복’이란 추상적이며 주관적이기에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것이다.
미국 작가 제임스 오펜하임은 ‘어리석은 사람은 행복을 먼 데서 찾는다. 현명한 사람은 행복을 자신의 발밑에서 키운다.’라고 말했고,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행복하기 위해선 남에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알베르 카뮈는 아들러의 미움받을 용기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고 제임스 오펜하임과 비슷한 이야기를 진중권 교수도 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내게 이미 있는 것’을 볼 줄 아는 사람과 ‘내게 없는 것’만 보는 사람. 이 둘의 차이다. 자신에게 이미 주어진 행복을 보고, 느끼고, 즐길 수 있어야 한다. 끊임없이 결핍만 보는 사람은 끝없이 불행할 수밖에 없다.” 모두 행복에 대한 정의보다는 ‘어떻게’ 또는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이야기하고 있다.
후배들에게 ‘행복한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오만하게 보일지 몰라도 막걸리 한잔하며 내뱉는 개똥철학이니 정교한 논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동차나 세탁기가 고장 나면 제품 설명서나 전공 책을 뒤적여 해답을 찾곤 하지만, 삶의 문제에 봉착해서는 책을 펼쳐 해결방법을 찾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왜 그럴까? 우리는 학교에서 ‘맹자는 성선설,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했다고 배우고 외워 4지선다형 시험문제를 풀었기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지식에 익숙해져 있다. 책을 뒤져가며 내가 왜 불행해졌나? 어떤 문제를 해결해야 행복해질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은 배우지 못했다. 그러기에 삶의 문제와 맞닥뜨리면 당혹스럽고 해결방안을 찾지 못해 전전긍긍한다.
한번 사는 인생이니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책에서 길을 찾아야 한다. 찾는 방법을 연습하고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공학이 우리의 생계를 책임지는 기술이었던 반면, 인문학은 세상을 폭넓게 볼 수 있게 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생존에 필요한 기술이다. 물론 ‘행복’을 찾는 방법도 알려준다. 책 100권을 읽어보면 내 말을 믿게 될 것이다.
한때는 ‘행복’을 찾기 위해 고민하며 공부했었지만 先學들이 이야기한 것같이 행복은 발밑에 있거나 이미 갖고 있으며, 공부하는 과정에서 하나씩 깨닫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하룻밤 자고나면 그 간단한 진리를 잊어버리기에 행복은 어디 있을까? 이렇게 평범한 것은 행복이 아니야, 특별한 행복은 무엇일까? 의심하고 또다시 찾아 헤매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는 죽을 때까지 행복을 모른다는 일본속담이 잘 들어맞는다.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지워나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행복한 상상들이 가득 차있는 버킷리스트중의 한 줄이 ‘바닷가 언덕 위 작은집에서 살기’이다. 작은 냉이꽃이 봄바람에 살랑대는 언덕 위 작은집에서 책 읽다 지치면 낮잠 자고, 멀리서 친구가 막걸리 한 병들고 찾아오면 김치전 부쳐 한잔하는 것이 퇴직 후의 행복이었는데 바로 논어 첫 문장 모습이다. 學而時習之(학이시습지)不亦說乎(불역열호) 때 맞추어 배우고 익히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不亦樂乎(불역락호)먼 곳에서 오랜 친구가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책읽기와 친구, 막걸리’는 개별적으로도 행복인데 셋이 뭉쳐있고 게다가 ‘바닷가 언덕 위 작은집’이니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행복이다.
‘바닷가 언덕 위 작은집에서 살기’를 ‘살아 보기’로 바꿨다. 시골살기에 반대하는 집사람 의견을 무시하고 ‘살기’를 강행할 만큼 용감하지 않을뿐더러, ‘가정의 행복’ 크기와 ‘살기의 행복’ 크기는 비교할 수 없기에 전망 좋은 곳에서 ‘한 달 살아보기’를 해보려 한다. 한 달 사는 동안 친구도 찾아올 것이며 책도 볼 수 있을 것이며 재미있고 행복하다면 두 달 살아보기도 괜찮을 것이다. 사실 ‘살아 보기’를 실행하지 않았더라도 버킷리스트에 한 줄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진행형이다.
행복이 추상적이고 주관적이라 정의하기 어렵다 해도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행복’을 찾으려고 과도하게 애쓰거나 더욱 ‘행복’해 지기위해 집착하는 것 자체가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든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에서도 가르치는 생활의 덕목으로 숨 쉬고 밥 먹는 일상이 행복임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살아 보기’가 아닌 ‘살기’에 집착한다면 ‘바닷가 언덕 위 작은집’으로 이사 가기 전까지는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돈 모으고, 집 구하러 다니고, 집을 꾸미는 등의 이사 가기 위한 과정을 행복으로 여긴다면 감내할 수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집착은 욕심과 가깝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서운해지며 이는 불행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편지받는 분들로 부터 거꾸로 ‘행복을 찾았습니까?’ 라는 답장이 올 것 같다. ‘예전처럼 행복을 찾으려 집착하지 않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해졌습니다.’라고 대답한다면 賢問愚答(현문우답)일까?
최근 읽은 책의 짧은 한 문장 무게가 태산 같다. ‘붓다는 행복을 찾아다니지 않는다.’(오래된 질문, 다산초당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