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후 집사람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발전소가 奧地(오지)에 있어 아이들 교육문제로 2001년부터 가족들과 떨어져 살기 시작해, 본사에 근무할 때 살림을 합쳤다가 공기업 지방이전으로 다시 떨어져 살았다. 퇴직 후, 오랜만에 살림을 합쳤지만 생활패턴과 생각하는 것 까지 합쳐진 것은 아닌 듯하다. 부부가 오래 살면 얼굴도 닮아가고 가치관과 성격도 닮는다는 비과학적 통설이 과학적인 사실로 밝혀졌다지만 떨어져 산 기간만큼의 공백은 차츰차츰 메워가야 하는가 보다.
인간은 진화하면서 여자와 남자는 상호의존 내지 보완적인 관계였기에, 연애할 때는 나에게 없거나 부족한 부분을 갖고 있는 상대방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콩깍지가 벗겨진 현실의 부부생활에서는 ‘다름’이 그리 매력적으로 작용하지 않는 듯하다.
백수가 되었음에도 규칙적이고 계획적으로 생활하는 것을 집사람은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도 오랜 기간 기러기가족으로 떨어져 살면서 누렸던 자유로운 삶이 남편 계획과 규칙에 의해 침해되는 부분도 있으며, 지나친 내 성격 탓에 기인한듯하다.
나는 어떤 일이든 계획이 있어야 마음 편하다. 오랜 기간 계획을 관리하며 얻은 일종의 직업병으로 ‘마음 편하다.’보다 ‘불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매일하는 반려견 산책도 몇 시부터, 어디로 갈 것인지 사전에 정해야 마음 편하나 집사람은 산책하고 싶은 시간에 집을 나서고 반려견이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이 그날 계획이다. 반려견 산책시키는 것을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테니 이 부분은 내 직업병이 중한 상태라 해도 할 말이 없다.
장보러 가는 일은 백수의 커다란 일과이며 시장구경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의미 있는 외출이다. 몇 시에 어디로 갈 것인가? 어떤 물건을 살 것인가? 알려 달라하면 시장 보는 것까지 계획이 있어야 하냐고 반문한다. 아무 때나 가서 제철에 나오는 좋고 맛있는 것 사오면 된다는 것이 집사람 지론이다. 주부에게 시장 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과 무계획적인 논리에는 언뜻 동의하기 어렵다.
나는 계획이 있어야 책 읽고, 친구 만나는 시간도 조율하는데 그렇게 살아오지 않은 집사람에게는 익숙지 않은 루틴일 것이다. 한편으로 집사람에 대해 이해도 되지만 ‘왜 무계획으로 살까?’에 대해서는 내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다.
유일한 취미인 민물낚시를 가지 못하게 하거나 적극적인 반대를 하는 것은 아니나 집사람은 낚시를 좋아하지 않는다. 낚은 후에 놓아준다 해도 살아있는 생명에게 고통을 주는 취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이유다. 그렇다면 고등어 굽고 소, 돼지고기는 어떻게 먹느냐는 나의 반격에도 흔들림 없이 먹는 것과 즐기는 것은 다르다고 답한다. 먹기 위해 잡는 것은 허기를 달래기 위한 것이니 생존을 위한 일이지만, 평화롭게 놀고 있는 붕어를 떡밥으로 꾀어내 날카로운 바늘로 코를 꿰어 잡은 후 다시 놓아주는 취미는 사기성이 있으며 야만적이고 가학적이기에 나쁜 취미란다. 놓아주는 것과 비교하면 먹기 위해 잡는 것이 붕어에게 더욱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집사람 주장에는 논리성이 떨어진다. 아니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막말에 가까울지 모른다.
직장생활하며 삼겹살과 돼지갈비 굽는 것에 질렸기에 고기 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삶아내는 수육이 건강에도 좋으나 집사람은 물기 있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아 수육은 물론 국에 넣은 고기도 즐기지 않는다. 집사람은 구워야 하고 나는 삶아야 한다. 같이 이야기하고 식사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우리부부가 다른 점이 많다는 것을 새삼스레 알게 되었다. 결혼한 지 30년이 넘도록 모르는 부분이 많다는 것이 신기하다.
‘어떤 모습으로 퇴직할 것인가? 퇴직할 때까지 해야 할 일들은 무엇이고 퇴직 후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40세 중반부터 나름대로 퇴직 준비를 했으나 막상 퇴직하고 보니 빠진 부분이 있었다. 어쩌면 현실적이며 가장 어려운 문제인 ‘퇴직 후 집사람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했다. 곧 퇴직하실 분들 중 황혼이혼 계획이 없다면 필히 해야 할 고민이다.
화성과 금성은 지구를 중심으로 생각하면 180도 반대에 있는 행성이기에 화성 논리와 금성 논리가 지구에 왔으니 충돌하는 것이 당연할 수 있다. 여성과 남성은 논리와 언어선택에서 차이가 있다며 명쾌하게 설명했던 베스트셀러의 책표지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You can't live with them and you can't live without them. 기막힌 표현이다.
‘퇴직 후 집사람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공통된 문제였으나, ‘나는 아니겠지!’하면서 간과했었다. 10여 년 전 김정운 교수 책을 읽었는데도 피부에 와 닿지 않아 웃고 넘어갔으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