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합니다.
올해는 유난히 흐린 날이 많습니다. 법무장관은 사퇴했지만 해를 넘겨 이슈가 되고 있고 후임 법무장관이 자리와 추문까지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깨어있는 지식인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수평을 맞춰주고 우리 삶을 대변해주고 보호해주면 凡人들이야 정해진 테두리 내에서 살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사람 사는 세상은 그리 순탄하지 않은가 봅니다. 어리숙하게 아직도 정의가 항상 이긴다는 믿음을 갖고 살아가고 있지만 믿음이 깨지는 빈도가 늘어가니 아이들 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마음 한편으로는 먹구름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 삶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계기도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잘 생기지도 않았으며 사회적 지위도 높지 않고 가방끈도 짧고 경제력도 뒤지지만 저 친구보다는 깨끗하고 정직하게 살았고 거짓말도 덜 하며 살았으니 다행이다. 논문 표절의혹도 없이 깨끗하게 잘 살아왔습니다. 양식 있게 살았고 사회정의를 외치지 않았지만 정의롭게 살았습니다. 아이들은 표창장 없이 수능성적대로 대학에 입학했으니 자긍심 느낄 정도로 공부했고 졸업해 자기 앞가림을 하고 있으며 경찰, 검찰조사 받은 적 없으니 민주시민으로 자랐습니다.
부정한 꼴을 눈뜨고 보지 못하는 성격이며 준법정신도 투철합니다. 하지만 부지불식간에 신호와 속도위반을 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 부분을 ‘집사람’ 핑계 대며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더 나아가 혹시 집사람이 위반했더라도 제 책임입니다.’
1월부터 코로나19가 시작되었습니다. 사회도 회사도 코로나에 대해 무지했을 무렵인 펜데믹 초기, 2차 간접 접촉자였기에 회사의 자가 격리조치로 며칠 감금생활을 해보니 코로나블루를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멘탈이 강한편이지만 코로나는 필히 정신적인 후유증이 수반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대인기피증, 혐오증 등의 사회적 신드롬을 유발해 비대면사회로의 전환을 촉진할 뿐 아니라 비대면 으로 인해 이 사회에 ‘仁’이 결핍되는 계기가 될 듯합니다.
. K-방역의 힘은 개인보다 집단의 이익과 안전 확보가 우선이라는 국민의식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동선을 공개하는 것뿐 아니라 접촉자 및 단순이동자 동선을 파악하는 것도 묵인했습니다. 다수의 안전을 위해 전체주의 국가와 경찰국가처럼 빅브라더 활약을 묵인했지만 상상 이상의 활약으로 凡人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公益과 私益사이의 中庸은 펜데믹이후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이기도 합니다. 서구에서 문제 삼고 있는 개인정보보호 및 공개 범주에 대해 우리도 치열한 논쟁이 있어야 합니다.
전문가들 판단으로는 코로나19의 기세가 해를 넘길 것 같답니다. 답답한 마스크지만 당분간은 한 몸으로 생각하고 지내야 할 듯합니다. 치료제와 백신이 강력한 효능을 발휘하기 전까지 믿을 것이라고는 마스크밖에 없으니까요.
역대급으로 지루하게 이어진 장마와 연이은 태풍은 우울해지는데 한몫 거들었습니다. 농가 피해를 잔득 주고 갔습니다. 나는 못되어도 주위가 잘돼야 하는데 주위도 잘못되니 당장 피해가 옵니다. 채소류가격이 급등해 삽겹살보다 상추가 비싸고 제철과일은 맛을 잃었습니다.
장마 와중에 어릴 적 기억을 끄집어 내봅니다. 더위에 지쳐 죽을라하면 장마가 시작되었고, 꿉꿉해 죽을만하면 장마가 끝나 대지를 말려줘 한시름 놓습니다. 또다시 시작된 더위로 혀가 바닥에 닿을만하면 이내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잠결에 얇은 이불을 끌어당겨야 했습니다.
이번 장마는 길기도 길었지만 동남아 스콜 같은 현상도 많았습니다. 동남아 ‘우기’특성을 닮아 가는 것을 보면 아마도 기상이변이 정착된 것 같습니다. 지구온난화는 전 세계적인 문제이고 탄소배출 문제로 2030년부터 내연기관의 몰락을 점치기도 합니다. 우리나라가 원자력을 포기했으며 탄소배출이 많은 석탄 화력도 감소추세이니 미래 에너지 믹스에서 신재생과 가스터빈 부분의 비중이 높아지겠지요. 하지만 정부 중장기계획에는 선언적 부분이 내포되어 있기에 산업계에서는 이를 감안해야 합니다.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합니다. 부동산 이슈는 전국을 뒤덮었고 나라는 시끄럽습니다. 저는 이 정권이 이야기하는 적폐입니다. 다주택자지요. 퇴직 후 노후대책으로 정부에서 권장한 부동산임대업을 시작했다가 하루아침에 적폐가 되었습니다. 전국 奧地에서 가족과 떨어져 근무한 대가를 모아 아파트를 구입, 임대했으니 떳떳한 돈입니다만 살다보면 내 뜻과는 다르게 세상이 굴러가는 수도 있으니 대꾸 않고 살아가면 됩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는 대꾸 않고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삶인가? 생각하게 됩니다. ‘입각한 사람들 모두 1주택’이란 신문기사를 보고 무주택자에 가까울수록 능력자로 평가받는 사회에서 저 같은 무능력자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마음이 흐립니다.
어떻게 사회초년생인 젊은이들이 서울에 집을 사서 직장을 다닐 수 있지요? 정부에서는 강남요지에도 서민과 젊은이들을 위한 소형주택을 짓는다고 합니다. 물론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사회첫발을 내딛자마자 서울에 집을 한 채씩 준다면 좋겠으나 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지요. 하지만, 젊은이들도 그런 것을 바라지는 않습니다. 집값이 안정화되어야 직장근처에 월세, 전세 살다 작은집을 구입하고 저축해서 평수 늘려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집값 폭등으로 이런 사다리가 없어졌으니 ‘이생망’이란 신조어가 나도는 것 아닐까요? 지금 같은 추세 하에 제가 사회 초년생이었다면 피켓 들고 시위하는 것이 아니라 촛불과 화염병을 들었을지 모릅니다. 부동산가격이 오르면 집을 몇 채씩 보유하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좋을 수 있습니다만 유주택이나 무주택이나 모두 어려워집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 역할은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개독교가 되었고 성직자인 목사님은 세금도 내지 않는 부도덕한 헌금 징수자가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 말씀을 전도해야 하는데 코로나19를 전파하는 집단이 되었고, 기독교 단체는 왜 그리 많은지 단체마다 ‘비대면이 옳다.’, ‘예배는 생명이라며 대면예배를 고집’하니 국민들 짜증지수는 폭발직전입니다.
물론 일부 사례이기는 하나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빛과 소금이 되어야할 종교가 사회 근심거리 내지는 국민 생명에 위협이 되는 존재가 된 사례로 인해 종교의 위치와 역할에 대해 재 정의를 해야 하는 사태가 올 것입니다.
최근에 읽은 책에 불교의 5계와 구약의 10계명을 비교한 대목이 있었습니다.
‘신의 입장에서 인간이 지키기를 바라는 내용과, 깨달음을 얻은 인간인 부처가 인간으로서 지켜야할 내용으로 정한 사항이 시간과 환경차이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것이다.’ - 아주 낯익은 지식들로 시작하는 인문학 공부 (신동기著, 아틀라스 북스刊) -
불교와 기독교가 내용적으로 비슷하고 천주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독교만 유별나게 보이는 것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 간의 상이점이 있을 테고 종교별 운영시스템도 상이점이 있을 겁니다. 불교와 천주교는 중앙집권적인반면 기독교는 지방자치제처럼 종파별/교회별 입장이 상이하기에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또한, 종교가 본연의 모습을 잃고 정치에 개입하거나 기웃거리게 되는 순간 영적으로도 흐릿해지기 때문은 아닐까요?
사회가 편 가르기, 여론몰이와 여론재판이 난무해도 바람직한 방향으로 간다면야 이상적인 참여 민주주의가 되겠지만 과하면 부작용을 낳기 마련입니다. 객관이 주관을 앞서는 사회가 되어야 하나 우리사회가 목소리 큰사람이, 객관보다는 특정인의 주관이 앞서는 사회로 가는 것 같습니다.
객관이 주관을 앞서는 사회가 되어야 하나 ‘객관을 빙자한 주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각종위원회가 ‘면피용’위원회인 것처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참여하는 중립적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운영하겠다는 것은 ‘객관을 빙자한 주관의 극치’입니다. 정의기억연대의 잘잘못은 밝히고 있는 중이지만 사회단체가 이념은 청렴한지 몰라도 행정, 회계, 운영 등에서 허술한 것은 확실합니다. 허점 많은 사회단체를 참여시킨다면 ‘객관’을 포장만 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까요?
* 특정인의 주관이 앞서는 사회: 소위 팬덤정치의 문제점과 위험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특정인의 주관에 팬덤이 맹목적으로 따르고, 목소리 큰 팬덤이 반대하면 침묵하는 다수를 보려하지 않는 기이한 사회,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 객관이 주관을 앞서는 사회: 주관이 뚜렷한 개인들이 논쟁을 거쳐 다수가 인정하는 객관을 만들어 내는 사회를 의회민주주의가 만들어가야 하나 21대 국회는 시작부터 폭망해 주관이 객관을 앞서는 비상식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흐린 날이 계속된다 해도 코로나 이후의 세상에 대한 준비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뉴 노멀을 이미 경험하고 있으므로 이전의 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국가와 기업의 생존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재보다 미래를, 나보다는 우리를, 그리고 후손들에게 창피하지 않은 결정은 무엇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저는 이 정권이 출범하며 내건 캐치프레이즈를 좋아합니다. 물론 그대로 실현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코로나 이후 펼쳐질 ‘뉴 노멀’만이라도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평하고 결과는 정의롭게’ 되었으면 합니다. 그래야 흐린 날이 가고 맑은 날이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