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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Feb 28. 2022

632. 신상 털기

원했단 길이 어느 길인가 自問했고 이미 답을 냈다.

 공기업 상임이사 선임관련 인사검증자료는 총 11가지로 ‘가족관계, 출생지, 혼인관계, 개인정보 동의, 동산/부동산 보유현황, 이력서, 인적사항, 징계 및 압류현황, 고위공직 예비후보 사전질문서, 성실답변 서약서, 후보자 직무역량 관련자료’를 작성, 제출해야 한다. 세부내용에 음주운전, 논문표절, 자금출처 등을 기재하게 되어 있으니 아마도 장관후보자 청문회 제출 자료와 같거나 비슷할 것 같다. 

 퇴직 후 낚시를 즐기고 있는 동안, 후보자가 되었으니 관련서류를 제출하라는 요청이 왔다. 자료를 작성하다보니 개인 신상이 탈탈 털리는 느낌인데 미묘한 문제가 생겼다. 존비속 동산/부동산 보유현황을 알아야 하니 출가한 큰아이와 집사람 재산을 파악해야 했다. 가족과 관련된 일이니 문제될 것 없어 보이나 우리 집 문화는 다른 집과 조금 다르다.


 30년간 집사람에게 월급봉투와 통장을 보여준 적이 없고 집사람 또한 보여 달라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내가 경제권을 쥐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재산의 90%이상은 집사람 명의로 되어 있으니 오히려 집사람이 경제권을 쥐고 있다. 우리 부부는 버는 만큼 알아서 돈을 쓴다. 무계획적으로 살고 있는 것 같으나 서로 사치하지 않으니 걱정 하지 않고 서로 간섭 하지 않는다. 아이들도 그렇게 자랐다. 아이들에게는 한 달 용돈을 주면 기분파 큰아이처럼 한 번에 쓰던, 깍쟁이 작은 아이처럼 차곡차곡 모아 해외여행을 가던 부모 간섭이 없었다. 단지, ‘누구하고 어느 나라를 어떤 경로로 다녀올 거냐?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는 먹는 것은 싼 것을 먹더라도 숙소는 비싸고 안전한 호텔을 잡아야 한다.’ 정도다.

 지방에 떨어져 살고 회사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파트, 차, 핸드폰 등 모든 재산을 집사람명의로 취득했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온 집사람과 출가한 큰아이에게 집, 주식, 예금내역을 탈탈 털라하니 가족들이 슬슬 짜증나는가 보다. 덜덜거리는 자동차의 등록증과 보험증서까지 달라하니 가족 단톡방에 자료를 올리면서 토를 달기 시작했다. 우리 집 문화에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아빠: 도와줄 일이 있음. 당신과 큰아이 재산상황을 알아야 함

큰 아이: 집하고 주식만 알려드리면 되나요?

아빠: 예금, 부채, 아파트, 예술품 가격..., 자동차 등록증과 보험증서도 필요하다.

집사람과 큰 아이가 요청자료를 단톡방에 올리면서 슬슬 짜증나는가 보다.  

큰 아이: 아빠, 대통령 선거 나가세요?

집사람: 설마, 대통령은 아니고 서울시장 출마하시겠지.

작은 아이: 소외되게 저에게는 왜 안 물어보세요? 

아빠: 너도 집하고 주식, 예금 있으면 빨리 털어

작은 아이: 혹시 보이스피싱 아닌가요?

집사람: (반려견)콜라도 집이 3채나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빠: 콜라는 혓바닥 내밀고 메롱 하는걸 보니 가진 것 없다고 오리발 내미는 것 같은데


 원자력분야 근무 시에도 1년에 한 번씩 재산신고를 했으나 이번 같지 않았다. 이 기회를 통해 신상 털기를 해보니 집사람과 내 재산이 얼마 정도 되는지 한 번에 파악할 수 있었고, 당분간 굶지 않아도 될 만큼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행이다.  


 처장, 상무로 진급하며 ‘상임이사 자리’를 놓고 한때는 고민했었다. 무거운 책임을 지고 몇 년 더 회사와 후배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가? 아니면 후배들과 같이 어울려 자유로운 삶을 살 것인가? 모두 의미 있겠지만 내가 절실히 원했단 길이 어느 길인가 自問했고 이미 답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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