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마다 신세를 지기에 潛行(잠행)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
* 2023년 말에 나주를 다녀왔는데 끄적거린 내용이 많아 앞으로 한 달간은 책이야기는 접고 나주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영광원자력발전소에서 같이 근무했던 후배는 타 회사로 전직해 요즘은 하동화력에서 근무하고 주말에는 가족이 있는 광주에 온다. 이번에 승격해 사업장을 옮기기 직전이라 얼굴 보는 것이 맞을듯하다. 오랜만의 만남이라 후배가 술도 한잔해야 하니 광주에서 만나기로 하고 음식점 예약을 부탁했다.
예약된 음식점을 검색해 보니 공기업 기준금액 3만 원을 훨씬 초과해 후배는 야단맞고 예약 장소를 변경했다. 퇴직했으니 비싼 음식 먹어도 되나 괜한 트집이었다. 하긴 이 친구는 20년 전에 같이 근무할 때도 야단을 많이 맞았던 친구다. 뻔한 월급이라 본인 앞날을 생각해야 하는데 형 노릇하느라 후배들을 너무 챙겨 야단맞았다. 오늘은 선배대접한다고 고급음식점을 예약해 야단맞았다. 야단맞는 것도 일관성 있고 꾸준한 친구다.
떡갈비 집으로 장소를 옮겼다. 오랜만에 얼굴 보는 맛이지 음식 먹는 맛인가? 물론 광주 명물인 송정 떡갈비골목 맛집인 ‘동성떡갈비’ 한우떡갈비 맛도 훌륭했다.
멀리 경주에서 나주로 출장 온 후배가 찾아왔다. 후배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신입사원으로 울진원자력에서 만났는데 이제는 후배들 가르치러 연수원에 강의 왔단다. 벌써 만난 지 25년이나 흘렀다. 팀장이 된 신입사원은 이제는 현역이 예비군에게 밥을 사야 한다며 식사 값도 지불했다.
코흘리개 신입직원이 듬직한 중견간부로 변신했으니 대견하다. 통풍치료 중인 나를 위해 샤브샤브를 메뉴로 정한 줄 알았지만 이유가 있단다. 직원들과 어울려 놀기 좋아해 사택 집들이를 구실로 전 직원을 초대했는데 그때 샤브샤브라는 음식을 처음 먹어봤단다. 솔직히 나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추억하고 있는 후배가 더욱 고맙다.
그 시절 같이 근무했던 또 다른 신입직원도 팀장이 되어 참석했다. 신입사원시절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그는 여전히 음식을 잘 먹는다. 울진원자력에서 근무할 때 고향으로 전근시켜 달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면담을 요청한 그 친구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저녁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는 심각한 표정과는 달리 밥을 세 공기나 먹어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되었다. 25년 전 그 이야기가 또 소환되었다.
경주보다 더욱 먼 UAE 바라카 원자력발전소에서 근무 중인 후배가 휴가 나와 영광에 있다며 연락 왔다. 어떻게 나주에 내려온 것을 알았는지 궁금했으나 물어보지 못했다. 나이 드니 깜박깜박한다. 술을 끊었지만 후배들은 한잔해야 하니 상사화로 유명한 불갑사를 지나 영광을 찾았다.
집으로 초대했으나 다음날 지인과 목포에 놀러 가기로 했기에 영광 읍내에서 후배부부를 만났다. 예나 지금이나 아옹다옹하며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 부부다. 신혼 때 만났는데 벌써 큰아이가 대학 졸업반이란다. 2주간의 짧은 휴가기간으로 마음도 바빴을 텐데 시간을 내준 후배가 고맙다.
같이 만난 깍두기머리 박 과장은 벌써 퇴직해 같이 늙어가는 사이다. 가족동반 행사에 코흘리개 꼬마들을 데리고 나왔던 박 과장은 아이들에게 나를 학교에서 교장선생님 같은 사람이라 소개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장성하여 취업을 앞두고 있단다. 심성이 착하지만 여전히 살벌한 외모의 박 과장으로 인해 영광읍 밤거리가 든든하다. 오래전, 팀장과 직원사이로 만났던 선후배들은 장년이 되었지만 오랜만에 젊어진 느낌이다.
한빛원자력발전소에서 두 친구가 찾아왔다. 굳이 계보를 따지면 본사에서 같이 근무했던 막내 동생과 아들뻘되는 후배들이다. 승격하면 무조건 발전소 현장근무를 해야 한다는 지론을 충실히 이행하는 친구들이다. 현장에서 근무하다 본사로 와야 현실감 있는 정책을 만들 수 있다. 조만간 본사로 복귀해 회사 미래를 만들어갈 친구들이다.
발전소 간부들은 다음날 새벽같이 출근해야 하기에 영광은 가깝지만 먼 거리다. 또한 저녁 식사 후 다시 발전소 앞 사택으로 복귀해야 한다. 마음이 바빠서인지 이야기 속도가 빠르다. ‘어떻게 행복하게 살아갈 것인가?’ 빠르게 이야기했지만 느리게 고민했으면 한다.
퇴직하기 전부터 사무실 간식을 책임졌던 문 여사도 열 살짜리 초등생 학부형이 되었다. 문 여사는 예나 다름없이 간식바구니를 갖고 왔다. 사무실에 찾아오는 손님들 대접할 것이 없었는데 과자, 젤리, 초콜릿, 감자 칩과 젤리, 약과가 가득한 커다란 바구니를 갖고 왔다. 사무실에 자주 찾아오는 팀장에게는 간식이 충분한지 바구니를 점검하라는 명령도 했단다.
통풍에 걸린 후 채식위주 식단으로 14Kg을 감량했으나 나주에 내려와 2달 동안 4Kg이 늘었다. 우렁각시들이 맛난 음식을 앞 다투어 대접한 덕분이며 문 여사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집에 있을 때는 간식으로 과일밖에 먹지 않았으나 손님 올 때 한두 개씩 먹은 간식으로 얼굴이 좋아졌다는 소리를 들었다.
유황오리누룽지탕을 놓고 모인 친구들은 縱(종)으로 橫(횡)으로 복잡하게 얽힌 사이다. 서로 적게는 두 번을 같이 근무했고 많게는 세 번을 마주친 친구들이다. 회사 속설에 세 번 마주치면 퇴직한다고 했는데 나는 퇴직했고 퇴직을 앞둔 친구와 퇴직하려면 10년 넘게 남은 친구도 있다.
회사에서는 수직적인 관계라도 삶은 수평적이다. 술 한 잔 들어가니 팀장과 팀원사이인 두 친구는 서로 흉보느라 쉴 새 없이 떠든다. 자고로 술자리는 떠들썩해야 흥이 난다. 이들의 號(호)는 酒堂(주당)과 虛堂(허당)이다. 술 마시고 흉보고 떠들어봐야 별 상처도 남지 않으며 내일 아침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만나는 유쾌한 친구들이다. 어쩌면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응어리를 남기지 않는 진짜 虛堂들이다.
여러 외부업체와 거래하는 업무를 하면서도 오랜 기간 한 번의 추문 없이 근무하는 후배들이 존경스럽다. 일찍이 가치관을 정립하고 삶의 중심을 잡고 살아가는 후배들이다. 이들은 여러 번 만난 사이라 말없이 알아서 챙겨준다. 불편사항이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 매일 찾아오는 마음이 고맙다.
나주에 정착한 친구는 저염김치와 나주 배, 기정 떡, 대봉 감, 돌김까지 챙겨줘 장 보는 수고도 덜어주고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줬다. 집으로 가기 전날, 가래떡과 삶은 고구마를 보내주셔서 고향방문 후 귀경하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주신 사모님께 본의 아닌 폐를 끼치고 올라왔다.
삶은 계획대로 흘러가는 법이 없다. 가능하면 조용하게 나주생활을 즐기다 올라가려던 계획은 여지없이 어긋났다. 너무나 많은 우렁각시들로 인해 조금은 시끄러웠고 그로 인해 더욱 행복했는지 모른다.
가까이 있는 종합기술원 옛 동지들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맙다. 또한, 잊지 않고 멀리서 찾아와 바쁜 시간을 할애해 준 옛 식구들이 반갑고 고맙다. 삶에 최선을 다하고 듬직하고, 존경받는 선배로 성장한 것이 더욱 고맙다.
나주생활을 접고 올라오는 날까지 일용할 양식과 따뜻한 마음을 화수분처럼 조달해 준 우렁각시들에게 염치없게도 2달 동안 신세 많이 지고 올라왔다. 가는 곳마다 신세를 지기에 다음 일정은 비밀로 하고 潛行(잠행) 해야 하나? 고민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