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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험한 모습의 幸運(행운)

때로는 험한 모습을 띠면서 으르렁거리며 오기도 합니다./전 대통령 김대중

by 물가에 앉는 마음

행운은 언제나 이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험한 모습을 띠면서 으르렁거리며 오기도 합니다. 6년 정도 감옥에 있으며 수많은 철학서적을 읽고 사색한 것은 지금 생각하니 행운이었습니다. (김영사刊, 전 대통령 김대중著,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행운은 험한 모습으로 올 수 있다는...’ 제 무릎을 치게 만든 말입니다. 이 글귀를 읽기 전까지 행운은 항상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가오는 줄 알았습니다. 행운이 찾아오는 前兆(전조)도 돼지꿈을 꾸어야 또는 꿈속에서 대통령을 만나는 등 吉夢(길몽)이 있어야 로또에 당첨되고 승진되는 행운이 찾아오는 줄 알았습니다.

예전 영광원자력발전소에서 전기팀장 할 때 四面楚歌(사면초가)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은 凶夢(흉몽)도 없었고 불길한 징조도 없는 평범한 날이었으나 불행이 으르렁거리며 한꺼번에 찾아왔습니다. 저에게는 불행이 아니라 災殃(재앙) 수준이었습니다.

- 직원은 안전사고로 병원에 누워있고,

- 사용후저장조(Spent Fuel Pool)에서는 조명등 파손부품이 발견되어 과학기술부 주재관이 오버홀 크리티컬공정(Critical Path)인 핵연료 교체작업을 중단시켰고,

- 우리 팀 오버홀 일용직원이 잘못 건드린 기기는 제작사가 정비해야하는 기기였기에 더욱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 한 개도 아니고 세 개가 그것도 한꺼번에 닥쳤는지 하나님께 대한 원망도 했습니다.

처해진 상황이 너무 절망스러워 평생직장인 우리 회사를 떠날까도 생각했습니다. 이참에 사표내서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벌어진 사태를 수습도 하지 않고 떠나는 저에게 비겁하다고 뒤에서 손가락질할까 더 두려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입사해서 시련이 닥치던 시기까지 20년 직장 생활하는 동안 커다란 桎梏(질곡)이 없었습니다. 아니 행운이 따랐는지 작은 시련조차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고비고비 때마다 훌륭한 멘토를 만났고 유능한 助力者(조력자)도 만났습니다. 사외 일을 할 때도 우연히 동문을 만나 도움을 받고 터무니없는 제 부탁을 들어주는 隱者(은자)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 같이 일하던 직원이 다치지도 않았고 하는 일마다 기대이상의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팀원들은 친동생 이상으로 잘 따랐고 고객들에게는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제게 닥친 재앙은 남들이 장기간에 걸쳐 겪어야 하는 입사 후 20년간의 시련이 한꺼번에 닥친 것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한꺼번에 닥친 불행은 재앙도 시련도 아니었습니다. 시련은 있어도 挫折(좌절)이 없었기에 지금 생각해 보니 으르렁거리며 험한 모습으로 다가온 행운이었습니다.

- 그 일이 있고 난 후 예전보다는 폄범한 일상현실이 감사해졌고 겸손해 졌습니다.

- 본인이 관련되었으나 책임을 회피하는 敵軍(적군)과도 만났으니 사람 보는 눈도 밝아졌고 본인과 무관한 일인데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友軍(우군)도 생겼습니다.

- 자신만만하던 콧대와 기가 꺾인 것은 아니고 성숙해지고 노련해졌습니다.

- 시련에 대한 耐性(내성)이 생겨 웬만한 시련에는 눈 깜짝하지 않는 대범함도 생겼습니다.


안전 불감증이었던 제가 남들이 閒職(한직)이라 일컫는 안전재난팀에 오게 된 것도 어쩌면 으르렁거리며 제게 찾아온 행운인지 모르겠습니다. 안전에 대해 더욱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고 생각하게 되어 남은 기간 편안한 회사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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