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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가에 앉는 마음 Jun 28. 2024

884. 지척에 있는 華城(화성)

수원 華城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정조와 실학자 정약용이다

 손녀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올 때까지 한가하다. 세 번째 직장에서는 오전 반나절은 자유시간이고 오후에만 반짝 바쁘다. 2024.03.07은 사위가 손녀를 돌보겠다 하여 온종일 휴가다. 지척에 있는 수원 華城에 가기로 했다. 광교에서는 불과 5Km, 분당에서는 20Km, 이렇게 가깝게 있는데도 처음 왔다.

 수원종합운동장을 지나 장안문옆길로 들어서니 華城안에는 기와집도 보이고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기분이다. 오늘은 華城박물관을 베이스캠프로 삼기로 했다. 박물관주차장에 주차하면 화성, 화성행궁, 카페와 음식점이 많은 행리단 길 등이 도보로 멀지 않다. 평일이어서인지 주차장은 여유롭다. 주차비는 1시간 무료에 10분당 300원으로 착하다. 


 수원華城박물관은 조선의 실학정신을 바탕으로 건설한 수원 華城의 우수성과 정조의 개혁정신을 알리기 위해 만든 전문 박물관이다. 華城築城室(화성축성실)은 축성과정 전반을 전시했다. 기록의 국가답게 축성과정을 기록한 儀軌(의궤)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축성하는 과정이 글과 그림으로 상세하게 기술된 화성성역儀軌(의궤)는 華城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원 華城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정조와 실학자 정약용이다(교과서에 나온다.). 정약용은 정조의 명을 받아 華城을 설계했다. 또한 축성과정에서는 직접 고안한 거중기(오늘날의 기중기에 해당)를 이용해 기간과 소요인력을 획기적으로 단축, 절감했다. 통상 10년 정도 소요되던 총길이 5.7Km에 달하는 화성을 2년 9개월 만에 건설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현대기술을 이용한다 해도 장마와 혹한기를 제외한다면 엄청나게 짧은 기간이다. 국민들을 부역시키지 않고 임금노동자를 이용했다고 한다.

 華城박물관은 2층건물이다. 1층은 기획전시실과 세미나실이며 2층은 화성축성실과 화성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다. 화성축성실은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았지만 화성과 정조, 정약용의 story를 담기에는 좁아 보인다. 의도적으로 ‘화성축성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나머지 사항들을 거두절미한 느낌이다. ‘華城’과 관련된 인물 이야기만 해도 끝이 없을듯하다. 보통 의궤에는 동원된 인물들의 출신지역과 이름까지도 기재된다. 정조와 정약용뿐 아니라 투입된 재료, 인력, 재원조달 등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할 것 같다.


 화성문화실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 씨를 위한 을묘년(1795년) 수원행차, 정조의 충신 채제공, 군사개혁의 핵심인 장용영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여기에서 ‘정조의 수원행차’가 무엇이 중요하기에?라는 의문이 든다.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당시 왕의 지방행차는 커다란 일이었다. 특히 한강 이남행차는 더욱 그렇다. 정조의 華城행차는 가는 데에만 1박 2일이 소요되며 한강에는 배다리(수십, 수백의 배를 연결한 후 판재를 가로질러 설치하며 만든 다리)가 설치되었다. 게다가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를 참배하러 가는 일이니 매우 특별한 일이었다.


 정조의 아버지는 思悼世子(사도세자)이며 어머니는 혜경궁 홍 씨다. 思悼世子는 삼복 더운 날씨에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세자가 죽자 영조는 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思는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悼는 일찍 죽는다는 뜻’이다. 思悼世子자는 영조의 지시로 세자대접을 받지 못하고 경기도 양주에 묻혔다. 왕의 묘는 陵(능), 세자는 園(원), 왕족이지만 세자가 아니면 墓(묘)였다. 思悼世子의 묘는 垂恩墓(수은묘)라 불렸다. 

 아들인 정조가 즉위 후 思悼世子의 무덤을 永祐園(영우원)으로 격상시켰다. 1789년에는 수원 花山(화산)으로 옮기며 顯隆園(현륭원: 현명하신 분을 융성스럽게 받든다는 뜻)으로 바꿨다. 이와 더불어 思悼世子의 명복을 기원하는 왕실사찰인 용주사를 건립하였다.

 수원華城이 완공되자 수원에 도착한 정조는 어머니를 모시고 아버지가 누워 계시는 현륭원으로 향했다. 혜경궁 홍 씨가 남편을 보낸 지 33년만으로 혜경궁 홍 씨는 설움에 통곡하였다. 19세에 혼인하고 18년 만에 남편이 세상을 떠나 33년 만에 만났다. 어느덧 혜경궁 홍 씨는 回甲(회갑)을 맞았다. 수원 華城에서 회갑연이 열렸으며 기념으로 수원의 빈민과 소외계층들에게 쌀이 배급되었다. 

 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화성성역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영조와 思悼世子의 갈등은 교육에서 시작되었다. 열 살 전까지는 영조가 思悼世子를 매우 예뻐했다. 한 살 때 王(왕)이라는 글자를 보고 아버지인 영조를 가리켰고 世子(세자)라는 단어를 보고는 자신을 가리켰다. 또한, 다른 왕세자들에 비해 공부 진도가 2년이나 빨라 천재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열 살 이후부터 영조와 思悼世子의 성향차이가 생기기 시작했다. 思悼世子는 영특했지만 강인하고 호방한 무인의 기질이 강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웬만한 무사들은 들기 힘든 월도를 자유자재로 사용했고 무예서인 ‘무예신보’를 편찬하며 무에 대해 남다른 열정을 보였다. 아들의 기질을 염려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던 아버지 영조와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었고 결국 파국을 맞았다. (역사저널 그날 3, 민음사刊)


 華城의 반만 들러보고 카페와 음식점 많은 행리단길에서 점심을 먹었다. 행리단길은 젊은 청춘들이 찾아서인지 한식, 일식, 프랑스, 이탈리아, 동남아음식 등 메뉴가 다양하고 예쁜 카페가 많이 있다. 물론 華城 부근에는 수원 하면 떠오르는 음식인 갈비, 통닭거리도 있다. 

 수원시립미술관과 화성행궁은 다음 방문을 위해 남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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