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가에 앉는 마음 Jul 09. 2024

889. 로스팅 Round1 에피소드

생산적인 유일한 취미, 그러나 효율적이지는 않다.

기상천외한 냉각도구

 생두 로스팅 후 껍데기인 chaff도 날리고 원두를 냉각해야 한다. 나주에서 지인들이 공방을 처음 운영할 때 환풍기와 채반으로 만든 냉각기를 사용했던 기억을 꺼내왔다. 창고에 쓰지 않는 써큘레이터가 있었고 포장박스를 잘라 냉각과 채프 날리는 장치를 의기양양하게 만들었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내의 눈을 의식하며 자신만만하게 써큘레이터를 가동했다.

 냉각은 되지만 chaff가 외부로 배출되지 않는다. chaff가 잠시 외부로 나갔다가 바람을 타고 벚꽃 잎 떨어지듯 휘날리며 작업장으로 날아 들어와 베란다가 chaff천지로 변했다. 

 아내가 난장판이 된 작업장을 보더니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란다. 채반 위의 원두를 정확히 조준할 수 있으며 바람양도 충분할 것 같단다.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해 보니 chaff도 효과적으로 날릴 수 있으며 냉각효과도 충분하다. 아내의 신박한 잔머리에 경의를 표하며, 아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허구가 아님도 깨달았다. 우리 집 냉각도구는 헤어드라이어로 의젓하게 작업장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로 수출된 원두

 작은아이가 원두커피를 좋아한다. 해외출장 시 현지 원두를 구입하거나 한국에서와 같이 로스팅된 원두를 사 먹는다. 벚꽃 보러 들어왔던 작은 아이는 원두 볶는 것을 독학으로 연습하는 내게 별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물론 나 자신도 기대하지 않고 있으니 섭섭해할 필요는 없다.

 로스팅된 원두는 실패했다고 해도 배달되어 오는 원두보다 신선하고 품질이 좋은 것이다. 몇 가지 커피를 시음해 보곤 네덜란드에서 내려 먹을 테니 원두를 볶아달라고 한다. 고민이다.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잘 볶아야 할까? 아니면 실패했지만 먹을만하다고 하니 다시 실패할까? 이상하고 아이러니한 고민이다. 

 잘 볶으려 하지 않고 실패한 로스팅 레시피를 따르기로 했다. 커피 5종을 400g씩 포장했다. 2000g을 로스팅했으니 추가로 10번을 연습한 것이다. 이러다 실패한 레시피가 몸에 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혹시 몰라 원두를 조금씩 덜어내 작은아이가 떠난 후 커피를 내렸다.

가볍기는 하지만 나쁜 맛은 아니다. 

 실패한 레시피로 생 초보가 로스팅한 원두가 비행기를 타고 네덜란드에 갔다. 로스팅을 독학한 지 일주일 만에 네덜란드로 수출한 것은 아마도 세계 최단은 아니더라도 한국 최단기록이 아닌가 한다.

 맛있으면 수출대금을 보내주기로 했지만 맛있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맛없어도, 대금을 아직 받지 못했어도 수출한 것은 맞다.  


기대만큼 유용하지 않았던 로스팅노트

 로스팅과정을 시시콜콜하게 기록하면 표준레시피에 해당하는 자료가 생산될 줄 알았다. 원두커피는 재연성이 중요하다. 맛있는 원두를 재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 기술이다. 지난번에 맛있었는데 오늘 커피 맛은 형편없다면 로스팅기술이 정립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업집이었다면 셔터를 내려야 한다.  

 직장에서 기록으로 모든 것을 증명해야 하는 품질보증업무를 했었으며, 기록이 중요시되는 원자력발전소에 근무했기에 모든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 놓으면 五感(오감)에 의존하지 않는 定型化(정형화)된 기술이 탄생할 것으로 기대했다.

 로스팅 일시, 생두 투입량, 예열 온도와 시간, popping시작시간, 가열온도와 시간, 종료시간, 그라인딩 하면서의 느낌, 향과 맛 등을 기록하지만 시간과 온도가 들쭉날쭉하다. 로스터의 잔열과 챔버온도, 외풍에 의한 열손실 등을 감안하지 않았기에 표준화된 레시피를 만들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로스팅을 하며 일정시간 자리를 지키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록 덕분이다. 로스팅도중 화장실도 다녀올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또한 예순 넘기면 어제 어떤 품종을 로스팅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정형화에는 실패했지만 기록으로 남기니 여러모로 편리하다.


생산적인 유일한 취미, 그러나 효율적이지는 않다.

 민물낚시와 끄적거리기가 취미인데 아내는 비생산적 취미라고 한다. 다른 집 남편은 바다낚시를 좋아해 구이나 횟감을 들고 오지만, 낚은 후 놓아주는 민물낚시를 하니 영양가 없으며 동물을 학대하는 나쁜 취미로 치부한다.

 원고료 수입 없는 전업작가이니 끄적거리는 것도 민물낚시와 별반 차이 없는 비생산적인 취미이며 자기만족적인 취미라고 한다. 맞는 이야기다. 황희 정승을 닮기로 한 요즈음, 아내이야기가 비논리적일지라도 무조건 옳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논리적으로도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재미로 로스팅을 한다고 하니 아내는 특별한 반대의사를 내지 않았다. 그러나 고가의 로스팅장비를 구매하는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재미를 붙이지 못하면 애물단지가 될 것이 분명한 일이니 처음부터 고가의 로스팅장비를 구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착한 남편은 아내 의견에 수긍했다.

 연습으로 로스팅한 원두커피 맛을 보더니 맛이 괜찮다며 만족해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내가 만족하는 생산적인 취미를 갖게 되었다. 시간과 금전을 투자해 비생산적인 결과를 얻으면 취미이며 생산적이라면 사업이라는 持論(지론)을 갖고 있으나 ‘로스팅에 실패한 원두’가 ‘아내 만족’이란 결과물을 생산해 냈다. 생산적이다. 

 생산적인 취미를 갖게 되었다지만 속내는 전혀 생산적이지는 않다. 생두 구입, 최저임금, 독학과 로스팅에 소요되는 시간투자, 작업장 청소 등을 따지면 생산적이지 않고 효율적이지 못하므로 사업이 아닌 취미라는 논리는 여전히 성립한다.

 낚시할 때 시간이 빨리 가듯 로스팅할 때도 시간이 빨리 흘러간다. 이것만 봐도 로스팅은 훌륭한 취미다.


주의 및 경고 1: 커피에 대해 일자무식인 생초보가 좌충우돌하며 로스팅하는 이야기이므로 따라 하면 무조건 실패한다.  

주의 및 경고 2: 로스팅은 생각보다 번거롭고 시간이 소요된다. 취미를 붙이지 못할 때는 로스팅된 원두를 구입하는 것이 맛있고 저렴하다. 

주의 및 경고 3: 앞으로 계속되는 커피이야기는 전문적이지 못하므로 커피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전문서적 구입 또는 전문 학원을 다니는 것이 좋다.

작가의 이전글 888. 잠들기 전에 읽는 쇼펜하우어(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