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똑같은 아파트 단지였다.
돌아서면 또 똑같은 벤치, 똑같은 흙냄새, 똑같은 전봇대.
나는 냄새로 세상을 읽지만, 그곳은 언제나 어제 맡았던 그 냄새였다. 길었던 줄은 건물과 건물 사이를 몇 번 흔들다 이내 멈췄고, 나는 엄마, 아빠 옆에서 조용히 앉아 있거나 형의 장난감을 물어뜯는 게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토리야, 나가자.”
그날, 아빠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게 울렸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 창문을 내리자 알 수 없는 냄새가 확 들어왔다. 축축하고 짭조름하고, 왠지 모르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아빠가 문을 열었고, 나는 문턱도 넘기 전에 뛰어내렸다. 발밑이 푹신푹신했다. 모래였다.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도시의 바람은 늘 어디엔가 부딪혀 울었는데, 이곳의 바람은 내 귀를 스쳐 도망치듯 지나갔다.
나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줄이 없다.
언제나 나를 붙잡고 있던 그 줄이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줄이 사라졌다는 건, 그만큼 자유롭다는 뜻이었다. 어딘가에 닿을 듯 말 듯, 멈추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분이었다.
귀 끝까지 바람이 닿고, 발밑에선 모래가 터진다. 물기 섞인 공기가 코끝을 간질이고, 바다 냄새가 콧속 깊숙이 들어왔다.
그건 매일 맡던 아파트의 정돈된 공기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냄새였다.
나는 몇 번이고 돌아봤다. 아빠와 엄마는 웃고 있었다.
따라오지도, 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건 마치, "이건 너의 시간이야."라고 말하는 눈빛이었다.
저 멀리 하얀 알약 같은 것들이 줄지어 있고, 그 옆엔 커다란 텐트도 있었다. 이상한 냄새들이 마구 섞여 있었다. 나무 냄새, 숯 냄새, 낯선 사람들의 체취.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싫지 않았다. 왜냐면 그 모든 냄새 속에 내가 있었다. 내 냄새도 그 속에 섞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에 발이 푹 빠졌다. 잠시 멈춰 고개를 들자, 파란 산들이 멀리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짖지 않았다. 대신, 다시 달렸다.
작은 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귀는 바람에 날리고, 내 눈은 웃고 있었고, 내 심장은 춤을 췄다.
나는 토리다.
줄 없는 해변에서, 나는 오늘 처음으로 나였다.
엄마가 내 이름을 부르며 손을 흔든다. 그 옆엔 누나가 모래 위에 앉아 조개껍질을 고르고 있고, 형은 바다 가까이에서 무언가를 파며 소리를 지르고 있다. 나는 얼른 모래를 튕기며 달려간다. 엄마의 손에는 작은 주먹밥 하나가 쥐어져 있다. 누나는 내 이마에 뽀뽀를 하고, 형은 내 귀를 간질이며 장난을 건다. 바람을 맞으며 먹는 그 맛은 평소 집에서 먹던 간식보다도 훨씬 맛있었다. 짭짤하고, 따뜻하고, 그 속에 사랑이 배어 있었다. 먹는 순간에도 나는 쉬지 않고 꼬리를 흔들었다.
해변 끝자락에는 조용히 파도가 밀려왔다가 사라지고 있었다. 물이 닿는 곳까지 조심스레 다가가 코끝으로 파도를 맡았다. 낯설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도 이런 냄새를 맡았던 것만 같았다. 혹시 내가 태어나기 전의 기억일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어둡고 좁았던 철장 냄새, 젖은 털 사이로 스며들던 차가운 공기. 그때 나는 그냥 '인천-부평-2023-012'라는 번호였다. 이름도 없었고, 누군가를 기다리면서도 누가 오는지도 몰랐다. 그냥 어딘가에서 따뜻한 냄새가 다가오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낯선 향기 두 개가 동시에 다가왔다. 하나는 포근한 담요 냄새 같았고, 다른 하나는 햇볕에 말린 셔츠 냄새 같았다. 나는 겁이 났지만, 이상하게도 꼬리가 저절로 흔들렸다. 그 손들이 철장 너머로 내 털을 살짝 쓸어내릴 때, 나는 그제야 알았다. 기다리고 있던 게 바로 이거였구나.
지금은 다르다. 나는 이제 토리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 부름엔 따뜻한 손과 웃음이 있고, 나를 안아주는 품이 있다.
조개껍질 옆에 놓인 나뭇조각들을 킁킁거리다 보니, 어느새 해는 구름 뒤로 숨었다. 해 질 녘 바다는 금빛으로 번들거렸고, 바람은 낮보다 부드러웠다. 나는 파도를 한 번 더 바라보다 엄마와 아빠, 형, 누나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저녁이 가까워진다는 건 아쉽지만, 오늘을 품에 안고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빠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가자 토리야.”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있고 싶었다. 내 발바닥은 아직도 모래를 느끼고 있었고, 내 코는 바다를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 말한다. 조금만 더, 오늘만은.
그러자 아빠가 웃으며 다시 앉는다. 엄마도 모래 위에 주저앉아 내 옆에 손을 얹는다. 우리 가족 넷, 아니, 다섯 식구가 그렇게 해가 지는 해변을 바라보았다. 바다는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날 밤, 나는 꿈속에서도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바람은 내 등을 밀어주고, 모래는 나를 받아주고, 파도는 웃고 있었다. 그건 단지 하루의 산책이 아니었다. 내 삶에서 가장 자유로운 하루였다.
나는 토리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세상엔 아파트보다 훨씬 더 넓은 곳이 있다는 걸. 내 코와 귀와 발이 기억하는 그 해변은, 언제든 다시 달릴 수 있는 나의 세상이다.
이 이야기를 쓰게 된 건 얼마 전 도서관에서 막내에게 동화를 읽어주던 날이었다. '문수의 비밀'이라는 동화를 읽다가, 문득 머릿속에 작게 흘러나오던 멜로디 한 줄에 마음이 멈췄다. "이 노래 들어봤는데..." 루시드폴의 노래였다. 반려견 문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조용히, 그러나 깊고 따뜻하게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은 노랫말이었다.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그 순간 우리 토리가 떠올랐다. 해변을 달리는 장면이 마음속에 선명히 그려졌고, 그렇게 나는 토리의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써봤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내가 내 방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토리는 방 한쪽 구석에서 무언가를 우물거리고 있다.
아! 며칠 전 막내에게 사준 로봇!
"야! 토리! 그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