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는 너구리가 산다.

by 바삭새우칩

어느 겨울날 아침,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간이었다. 출근길에 문을 나서려는데, 어스름한 주차장 쪽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개였다. 아니, 처음엔 그렇게 보였다. 주인 없이 돌아다니는 떠돌이 개인 줄 알았다. 뼈마디만 남은 마른 몸, 짧고 투박한 꼬리, 조심스레 걷는 자세. 못생겼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난 그냥 지나쳤다.


며칠 뒤, 아파트 인터넷 게시판에 글이 하나 올라왔다.



‘어젯밤 너구리를 봤어요. 주차장 쪽에서...’

그 글을 기점으로 목격담이 하나둘 이어졌다.

‘밤에 쓰레기장 뒤에서 봤다’

‘저녁 늦게 놀이터 근처에서 봤다’

‘버스 승강장 쪽으로 사라졌다’

대부분 밤이나 저녁 시간대였다. 우리 집에서도 목격자가 생겼다. 할머니와 아이들이었다.


"아빠, 진짜 너구리야. 눈이 반짝했어."


나는 잠깐 멈칫했다. 그날 아침 내가 봤던 그 ‘개’가 너구리였구나. 신도시, 그것도 아파트 숲 한가운데 너구리라니. 어딘가 퍼즐이 잘못 맞춰진 느낌이었다.


우리 아파트 앞에는 제법 넓은 갈대밭이 있다. 개발 과정에서 어쩌다 남겨진 땅에, 누가 일부러 심은 것도 아닌데 갈대가 자라났다. 안내판 하나 없이 바람 따라 흔들리던 갈대 줄기들이, 거실 창에 한 폭 그림처럼 걸려 있었다.


‘녀석들, 저기서 살고 있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가 갈대밭 주변 산책로에 경고문이 붙기 시작했다.


'야생 너구리 출몰 주의!'

'야생동물 발견 시 접근금지'
‘광견병 예방약 살포. 반려견 섭취 주의.’


문구엔 너구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귀여운 야생동물’에서 ‘위험한 병원균’으로 옮겨갔다.

나도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할 때면 덤불 근처는 슬쩍 피해 갔다. 강아지가 자꾸 줄을 당기며 가려는 방향을 돌려 잡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실 창으로 보이는 갈대밭이 유난히 시끄러웠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일었고, 노란 불도저가 거칠게 갈대를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아내에게 물었고, 아내는 담담히 말했다.


"근처 골프장에서 대회를 연대. 주차장이 모자라서 저기다 임시 주차장 만든대."


그 말을 듣자마자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깟 대회 때문에, 너구리들 집을 밀어버린다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그게 맞아?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고."


아내는 나를 한참 쳐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오빠가 그런 말 할 줄은 몰랐네. 평소에 자연보호엔 관심도 없고, 분리수거도 대충 하는 사람이..."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정말 화가 났다. 단순한 감정은 아니었다. 마치 집을 잃어본 사람만이 아는, 어딘가 깊고 낯선 분노. 어릴 적, 반지하로 쫓기듯 이사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의 곰팡이 냄새, 낮은 천장, 눅눅한 공기. 밀려나고 있는 갈대와 겹쳐졌다.

아내는 말없이 창 앞에 섰다. 그리고 한참을, 짓이겨지는 갈대들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누구든 화라도 내야지."


작은 목소리였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그날 이후 갈대밭은 반쯤 사라졌고, 너구리 목격담도 줄어들었다. 게시판은 너구리 이야기는 없었고, 산책길에서도 더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았다. 사람들과 나 역시도 어느새 잊은 듯했다.


몇 주 뒤,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더 멀리 있는 공원까지 산책을 나갔다. 도로를 하나 건너면 나오는 그 공원은 신도시 끝자락에 조성된 대형 공원이었다. 평소엔 산책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만 보이다가도, 이따금 야외 공연이나 지역 행사가 열릴 땐 북적이는 곳이다. 산책로 옆으로 키 큰 나무들과 풀숲이 드문드문 이어졌고, 아이들은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다녔다. 아내는 강아지 목줄을 잡고, 나는 그 옆에서 풀숲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곳에 다시 그 경고문을 보았다.


'야생 너구리 출몰 주의!'


낯익은 경고문이 나무 기둥에 붙어 있었다. 아래엔 낡은 플라스틱 통에 사료 비슷한 것들이 담겨 있었다. 아, 여기구나. 녀석들은 이곳으로 온 거였다.

우리는 그곳 벤치에 앉아 한참을 머물렀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스쳤고, 멀리서 아이들 웃음소리가 흘러왔다. 나는 햇살 아래 풀숲을 바라보다가, 불쑥 떠오른 생각에 마음이 걸렸다.
녀석들도 결국 집을 잃고 이곳까지 옮겨온 셈이다. 풀숲 사이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리는 듯했다. 바로 근처 어딘가, 우리 곁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을지도 몰랐다.


어릴 적 나도 그랬다. 살던 집에서 쫓겨나듯 떠밀려, 반지하의 눅눅한 공기 속에 던져졌던 시절. 그곳에서 버티며 하루하루를 넘겼고, 결국은 이렇게 그럭저럭 번듯한 아파트에까지 오게 되었다. 너구리들도 이곳에서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자신들만의 보금자리를 꾸려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쫓겨난 존재끼리의 묘한 동질감.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 공감 같은 것이, 마음 깊은 곳에서 스며올랐다.

돌아가는 길, 아이가 말했다.
"아빠, 다음에 또 와보자. 혹시 너구리 볼지도 모르잖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또 와보자."

그리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우린 동네에는... 여전히 너구리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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