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인제 점봉산 곰배령
황금연휴의 시작은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뜬 마음으로 다가왔다. 달력의 빨간 숫자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작정하고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연휴나 시간이 날 때면 가족과 함께 강원도 양양에 있는 부모님 댁에 가곤 한다. 곰배령을 찾은 이유도, 인제에 위치한 그곳이 양양과 가까워 예전부터 한 번쯤 다녀오고 싶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작년 여름, 폭우 속에서 우비까지 챙겨 올랐으나 중도 포기했던 곰배령 등반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 미련을 씻어내기 위해, 이번엔 미리 숲나들e에서 등반 예약을 해두었다. 무려 한 달 전부터 준비한 도전이었다. 단순한 즉흥이 아닌, 계획과 실행이 어우러진 진짜 ‘도전’이었다.
곰배령은 봄의 끝자락, 5월 초에 가장 아름답다 했다. 때맞춰 들꽃이 피어나고, 나뭇잎도 선명한 연둣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나는 시작부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꽃가루 알러지. 눈은 간질거리고, 콧물은 끝없이 흘렀다. 이 정도면 오르지 말아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엔 지난해의 미련이 너무 컸다. 이대로 또 물러서긴 싫었다.
곰배령 입구를 지나자마자 숲은 생각보다 깊고 청명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고, 길 가장자리엔 이름도 모를 들꽃들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누군가는 '야생화 천국'이라 불렀다. 등산로 입구에서 국립공원 직원분들이 나눠주는 곰배령 들꽃 팜플렛을 받아 들었을 때만 해도, 낯선 이름들로만 가득한 그 목록이 과연 실감 날까 싶었지만, 길을 오르다 보니 정말로 그 꽃들이 군락을 이루며 곳곳에 만개해 있었다. 동의나물 꽃, 홀아비바람꽃, 현호색 꽃이 그야말로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아이들은 꽃을 보며 탄성을 질렀고, 나 역시 문득 훌쩍이는 것도 잊은 채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이 풍경만으로도, 올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곡을 지나며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기운이 땀을 식혀주었다. 물소리는 고요했고,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물은 오래전 시골 여름방학의 추억처럼 느껴졌다. 아버지 손을 잡고 물장구치던 그 계곡이 떠올랐다. 지금은 내가 아버지의 자리에 있고, 내 손을 잡고 걷는 아이가 있다.
작년의 실패 지점이기도 한 곰배령길 중간에 위치한 강선마을에서 잠시 쉬며 아이들에게 화장실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들은 척도 않고, 가져온 초코바를 맛있게 먹는 데만 열중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작은 선택이 곧 이 난감한 사태로 이어질 줄은.
그렇게 곰배령 정상까지 800미터를 남겨두었을 때, 사건은 터졌다. 막내아들 녀석이 다급하게 내 바지를 잡아당겼다. 얼굴은 심각했고, 눈빛은 간절했다.
“나 똥 마려워.”
순간,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듯했다. 숲 속엔 화장실이 없었다. 게다가 등산로 양옆을 벗어나면 10만 원 벌금이라는 무시무시한 경고문까지 붙어 있었다. 아까 지나쳤던 강선마을 화장실까지는 다시 한참을 내려가야 했다.
나는 급히 아내를 불러 세웠다. 숨을 고르며 짧은 가족회의가 시작됐다.
"여보, 큰애 데리고 먼저 올라가. 여기까지 왔는데 누군가는 꼭대기 찍어야 하지 않겠어?"
아내는 짧게 숨을 들이켰고, 큰딸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진짜야? 우리만 가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막내를 안았다. 아이는 배를 움켜쥐고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나 진짜 진짜 똥 마려워... 지금 나와..."
"조금만 참을 수 있지? 자, 이리 와. 얼른 내려 가자."
아내는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끼리 올라간다. 무리하지 말고."
그렇게 역할은 나뉘었고, 나는 막내를 둘러 안았다. 그리고 산을 내려갔다. 등산로를 되짚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올라갈 땐 몰랐던 돌계단의 경사, 경사보다 더 무서운 건 막내의 표정이었다.
'지금 당장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다'는, 절박한 눈빛.
무릎이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익숙한 마을 어귀의 산길에 이르렀을 때, 화장실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거의 끊어질 듯했던 힘이 다시 솟구쳤다. 도착과 동시에 막내는 화장실로 돌진했고, 나는 그 앞 벤치에 주저앉아 한참을 헉헉거렸다. 아이는 볼일을 보고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나왔다. 배 속에 들어있던 시한폭탄이 해제된 듯, 표정이 말끔해졌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마을을 둘러보았다. 작고 조용한 마을. 아까 올라갈 때 지나쳤던 민박집 옆 식당이 눈에 들어왔고, 감자전을 시켜 아이와 나눠 먹었다. 바삭한 첫 입에 기대가 컸다. 아이와 함께 꽤나 맛있게 먹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의 대화 속에서 무심히 흘러나온 말과 벽에 붙어 있는 재료 표시를 보고서야 냉동식품이라는 걸 알았다. 순간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그래도 솔직하게 냉동이라고 말해주신 게 오히려 좋았다. 지역 농산물 가공품이라서 그런지 맛도 나름대로 괜찮았고, 아이만 잘 먹으면 됐지 싶은 마음이었다.
시간은 흘러 약 한 시간 반쯤 지나자 아내와 큰딸이 내려왔다. 정상 인증샷을 보여주며 자랑했고, 아이는 억울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오늘 올라간 등반객 중 아마도 우리 가족이 거의 마지막일 것이다. 등산로 입구로 다시 내려오자 국립공원 직원분들이 아이들에게 수고 많았다고, 잘 내려왔다고 웃으며 말을 건네주셨다. 지친 얼굴에 따뜻한 인사를 받자 아이들도 기분이 풀리는 듯했고, 우리도 힘겨웠던 여정을 마무리하는 기분이 들었다.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대부분의 차들은 떠난 뒤였고, 우리 차와 몇 대만이 외롭게 남아 있었다.
북적거리던 산속 주차장은 다시 조용해졌고, 바람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절반의 성공이었다. 온 가족 모두 정상을 밟진 못했지만, 다시 돌아왔고, 아이와 함께 걷고, 함께 웃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곰배령에 오를 사람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하자면, 주차장에서 볼일을 꼭 보고 시작하자. 그리고 낌새가 이상하다 싶으면, 강선마을에서 꼭 화장실을 다녀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올해의 곰배령은 꽃과 계곡과 땀, 그리고 '똥마려!'라는 외침으로 기억될 것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나는 끝내 실패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한번 도전할 것이다. 그땐 꼭 정상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