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퍼펙트 데이

퍼펙트 데이즈. (2023)

by 바삭새우칩

영화가 끝나고도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티비화면이 꺼진 뒤에도,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눈앞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머릿속은 어떤 장면들로 가득했다.

[퍼펙트 데이즈], 넷플릭스에서 우연히 보게 된 조용한 영화 한 편이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처음엔 일본 영화인가, 독일 영화인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쿄를 배경으로 일본 배우들이 등장하지만, 이 영화를 연출한 건 독일 감독 빔 벤더스였다. 국적보다 더 진하게 다가온 건, 영화에서 말하는 그 하루의 감정이 나에게도 낯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원래 일본 영화를 좋아한다. 거창한 사건 없이 이야기가 흐르고, 굳이 모든 걸 설명하려 하지 않으며, 장황한 마무리 대신 조용히 스쳐 지나가듯 끝나는 영화들. 그런 결이 좋다.

[퍼펙트 데이즈]도 마치 그랬다. 히라야마의 사연 따위는 세세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큰소리 내지 않으면서도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리는 방식으로, 조용히 남았다. 특히 마지막 장면, 히라야마가 차 안에서 음악을 듣고 있다가 울음을 삼키듯 고개를 돌리는 그 순간. 그는 정말 울고 있었을까, 아니면 웃고 있었을까. 그 감정을 단정 지을 수 없는 그 표정이,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그 얼굴. 아마도 그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하루의 깊이, 감정의 복합성, 그리고 살아 있다는 느낌일지도 모른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남자의 하루. 대단한 사건도, 반전도 없다. 그는 매일 같은 시각에 일어나, 같은 루트를 따라 화장실을 청소하고,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고, 오래된 카세트 테이프를 꺼내 음악을 듣는다. 그리고 밤이면 방 안의 조용한 어둠 속에 누워 눈을 감는다. 그가 말하는 장면은 거의 없지만, 그 고요한 하루가 오히려 많은 걸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걸 좋아했다.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익숙했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내 나이보다도 오래된 올드팝들을 듣고 있다. 더 스타일리스틱스, 루 리드, 패티 스미스, 같은 뮤지션들이 내 재생목록에 오랜 친구처럼 자리 잡고 있다. 《퍼펙트 데이즈》 속 히라야마도 나처럼 올드팝을 좋아했다. 그는 낡은 카세트 테이프에 담긴 음악을 틀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그 하루의 끝을 채웠다. 그 장면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뜨거워졌다. 이름은 히라야마였지만, 사연도 모르는 그 사람이, 마치 나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나는 영화 속 음악들을 하나하나 찾아들었다. OST 리스트는 어느새 내가 좋아하는 올드팝 모음집이 되어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 안, 사람들 틈에 서서 루 리드의 ‘Perfect Day’를 들으면, 영화 속 그 장면이 어김없이 떠올랐다. 나뭇잎사이로 반짝이던 햇살, 카세트 속에서 흘러나오던 음색,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히라야마의 모습.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모든 것이 선명하게 남았다.

나는 며칠이고 그 영화를 곱씹었다. 히라야마는 왜 저렇게 조용히 살아가는 걸까. 왜 그렇게 무언가를 기다리지 않는 걸까. 그런 질문들을 던지다 보니, 나도 나의 하루를 돌아보게 됐다. 지금까지 나는 특별한 사건이 있어야만 글이 된다고 생각했다. 여행, 사고, 이직, 상실 같은 것들. 하지만 그 영화는 아무것도 없는 하루도, 그 자체로 충분히 의미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거 같기도 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어떤 감정이 스쳐갔는지를 기록하기 위해. 아이들이 툭 던진 말 한마디, 아내의 웃음소리에 잠깐 머뭇거렸던 내 표정 같은 것들.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글을 쓰면 하루가 조금 더 반짝이는 것 같다. 별일 없이 지나갔던 장면들이 문장 속에서 다시 살아나고, 흐릿했던 감정이 조용히 제 자리를 찾아온다. 잘 살아야겠다는 다짐보다, 잘 들여다보겠다는 마음이 더 커졌다. 삶은 꼭 무언가를 이루어야만 가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작가도 아니고, 대단한 이야기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다만 글을 쓰는 동안만큼은 내 하루가, 내 생각이, 내 감정이 조금은 의미 있는 무언가가 되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꽤 소중한 감정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그런 내 마음에 조용히 말을 걸어왔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반복되는 하루 속에도,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에도,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나는 그 조용한 확신을 붙잡고, 오늘도 몇 줄의 문장을 적는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의 퍼펙트 데이는, 그렇게 매일 조금씩 완성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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