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1998)
[8월의 크리스마스]가 처음 개봉했을 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무슨 영화인지도 몰랐고, 굳이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그 시절의 나는 아마 제목을 보고 ‘왜 8월에 크리스마스지?’ 하기는커녕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도, 이별도, 삶의 무게도 알지 못했던 시기.
당시 내게 더 중요한 건 철권의 콤보를 얼마나 정확히 외우느냐, 친구들과 PC방에서 몇 연승을 하느냐 같은 것들이었다.
그 영화가 어떤 감정의 결을 담고 있는지,
제목에 녹아 있는 계절과 시간의 결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 시절의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 얼마 전, 넷플릭스를 켜다가 아내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 마주했다.
예전에 OCN 같은 케이블 영화 채널에서 스쳐 지나가듯 본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조용히 처음부터 끝까지 앉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오랜만에 조용한 영화를 보고 싶다고 내가 먼저 말했다.
아내는 본 적 없다며 고개를 저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아무런 기대 없이, 조용히 흘러가는 영화를 원했던 여름밤에 우리는 이 영화를 틀었다.
정원의 표정, 사진관 셔터 소리, 다림의 걸음걸이.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감정들이,
화면보다 먼저 마음속에 들어왔다.
이 영화가 멜로일까?
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바라보고, 감정이 스치는 순간들은 분명 있다.
하지만 흔히 말하는 멜로처럼 고백도 없고, 갈등도 없고, 뚜렷한 매듭도 없다.
그저 감정이 눈빛을 타고 조용히 흘러갈 뿐이다.
나는 오히려 그런 게 좋았다.
요즘 사랑은 빠르고, 분명해야 하고, 효율적이라고 한다.
대화 앱으로 시작해 이모티콘으로 정을 나누고, 클릭 몇 번이면 정리가 되는 관계들.
사랑이라는 단어에 속도와 타이밍이 덧씌워진 시대.
꼰대의 영역에 이제 갓? 진입한 나는 솔직히 요즘 사랑의 방식은 잘 모르겠다.
나도 이제는 한 여자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빠이다.
사랑의 시작보다는 결실 속에 있는 사람이다.
사랑이라는 게 어떤 환희보다는, 함께 살아내는 시간이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그래서 정원이 다림을 바라보던 그 시선이 괜히 오래 마음에 남았다.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그 순간을 그냥 조용히 담아두려는 사람.
그 방식이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더 익숙하고, 더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그 감정을 감싸고 있는 영화의 분위기.
요즘 말로 치면 ‘레트로’라고들 하겠지만, 이건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시멘트 브로크 벽돌 담장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그 회색 벽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디선가 벽돌에 낀 이끼의 꿉꿉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비라도 맞았을까 싶은 눅눅한 표면, 그 사이사이로 스며든 오래된 시간.
그 시절에만 존재하던 거리의 질감, 시간의 속도, 사람 사이의 거리 같은 것들이 그 담장 하나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런 풍경을 그대로 품고 있다.
낡은 간판, 수동 카메라, 인화된 가족사진, 느릿한 거리 풍경.
90년대의 공기 자체가 영화 속에 살아 있다.
그 시절을 살아본 사람에겐 아마도 뼛속까지 익숙하고 그리운 감정일지도 모르겠다.
나이를 먹어가며, 영화 한 편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예전엔 줄거리와 결말이 중요했지만, 이제는 인물의 숨결, 공간의 결, 감정의 틈 같은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요즘 들어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을 때면, '감정의 성숙함'이라는 말이 자주 머리를 맴돈다. 40대에 접어들며 생리적인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가 생각도 해보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하다. 감정의 성숙이란, 결국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더 적은 말과 더 느린 시선으로도 세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일. 누군가의 눈빛을 오래 바라볼 수 있고, 침묵 속에서도 무언가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 예전처럼 감정을 쫓기보다, 이제는 감정이 머무는 자리를 바라보게 되었다.
...아, 결론은 그냥 40대의 호르몬 변화가 맞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런 관점의 변화를 조용히 받아주는 영화였다.
정원은 사진관을 지키며 조용히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는 아무것도 특별한 걸 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마지막 고백을 하지도 않고, 감정을 밀어붙이지도 않는다.
그 대신 그 감정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사진을 찍는다.
그가 남긴 건 한 장의 사진, 조용한 표정, 그리고 다림이 기억할지도 모를 짧은 인연.
그뿐이다.
하지만 나는 그게 오래 남았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아무 말 없이 그 장면들을 바라봤다.
예전 같으면 어땠을까. 저렇게 말없이 흘러가는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감정이 있다는 걸, 우리도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됐다.
영화가 끝난 뒤 아내가 조용히 말했다.
“이거... 좋다. 왜 이걸 이제야 봤지?”
그 말이 딱 내 감정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이불을 덮고 누웠다.
화면은 꺼졌지만, 마음속 장면들은 계속 돌아갔다.
셔터 소리, 여름빛,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정원의 마지막 웃음.
그리고 그 모든 장면 위로, 90년대의 뿌연 듯한 영상미가 머릿속을 부유하듯 흘러갔다.
아무 일도 없던 하루처럼, 아주 조용했지만 오래 남는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