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타이거. (2021)
우리가 발람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주인을 배신하고,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고, 도시 한복판에서 제 삶을 새로 시작하는 그 대담함을. 영화를 보고 난 첫 느낌은 그거였다.
“아, 나는 못 했겠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익숙함 때문이다. 기꺼이 참는 법, 버티는 법, 눈치 보는 법은 이미 몸에 깊게 새겨져 있으니까.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아내에게 물었다.
"회사는… 원래 참고 다녀야 하는 곳일까?"
아내는 잠깐 멈칫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가 봐."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엔 그런 말들이 너무 많아졌다.
"원래 회사는 다 그런 거야."
"어디 가도 다 똑같아."
"그냥 참고 다녀. 버텨야지."
그 말을 제일 자주 하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부모님들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 중 누구도 '회사를 오래 다녀본 사람'은 아니었다. 장사를 했고, 기술을 배웠고, 일용직으로 현장을 돌았고. 사대보험이 있고, 월차가 있고, 상사가 있고, 회식이 있는 '회사'는, 사실 나의 것이었다.
나는 이제 한 회사에 몸담은 지 16년 차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부모님의 조언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회사를 경험해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모르겠다. 그 말들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어른들의 막연한 믿음이었는지. 참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편해지는 날이 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참고 살다 보면 그게 ‘살아진 거’라고 믿게 되는 건지.
회사는 정말 참고, 견디면 다닐 수 있는 곳일까? 그 인내의 끝엔 정말 어떤 보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그 인내 자체가 우리의 생계를 유지해 주는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에,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가 있고, 대출이 있고, 나이도 있다면 참는다는 건 단지 미덕이 아니라 구조다. 참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책임진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래 보지만, 그 위안이 정말 진실인지 가끔은 의심이 든다.
《화이트 타이거》의 발람은 그 질문을 정면으로 마주한 인물이었다. 그는 ‘좋은 하인’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자존심도, 꿈도, 감정도.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는다.
그 장면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매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족은 '돈을 벌어오는 존재'로서만 자신을 바라보았고, 그 외엔 어떤 존중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발람의 선택은 감정의 단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강요당해 온 효와 희생의 굴레에 대한 절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것이 정말 도덕적인 선택일까. 그 선택을 거부한 발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생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일까.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침이면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허둥대고, 회의 시간에는 말보다 표정을 살피고, 저녁엔 다들 퇴근했는데, 보내는 메시지 하나에도 눈치를 보는 나. 가끔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겠는 날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발람에게 자꾸만 나를 이입하게 되었고, 나는 과연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그는 끝내 도망쳤고, 나는 매일 출근한다. 그는 칼을 들었고, 나는 회의실 문을 연다. 선택의 무게는 다르지만, 어쩌면 본질은 같았는지도 모른다.
인도엔 계급이 있다지만, 우리에겐 없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과연 직장생활 말고도, 이 사회에 계급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우리는 서열과 위계에 익숙해져 있다. 나는 가끔 회사 안에서, 또래들과 밥을 먹다가, 그런 생각을 한다. 이 구조 안에 보이지 않는 벽이 있는 건 아닐까. 누군가는 끝없이 지시하고, 누군가는 끝없이 듣고. 그 구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건 아닐까.
문득 요즘 MZ세대가 생각났다. 그들은 말한다.
힘들면 힘들다. 싫으면 싫다. 속으로만 삼키지 않고, 바깥으로 내보내는 말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요즘은 그게 부럽기도 하다.
나는 그 나이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그땐 그게 예의인 줄 알았고, 그게 성숙한 태도인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내 마음을 몰라주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회복이라는 걸. 내가 무너지기 전에, 내 마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라는 걸.
발람은 그렇게 말한다.
"닭장은 문이 열려 있는데, 닭들이 나가지 않는다."
그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우리는 어쩌면,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가도 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아내는 아직도 묻는다.
"그래도 참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나도 쉽게 답하진 못한다. 하지만 오늘도 생각한다. 이게 정말 ‘참아야만 하는 일’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어온 일’인지.
오늘도 어김없이 지하철에 오른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칸, 비슷한 사람들 틈.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로 나도 그중 하나가 된다.
메일함을 정리하고, 회의실 문을 열고, 조용히 퇴근한다.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하루였지만, 마음 한편엔 묵직한 감정이 남는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발람이 떠오른다.
그의 선택과 나의 현실, 그의 칼과 나의 키보드, 그의 도망과 나의 체념.
그는 뛰쳐나갔고, 나는 남아 있다.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다.
지금 글을 쓰고, 회사 밖에서 작은 활동을 시도하는 나의 몸짓은, 어쩌면 그와 닮은 어떤 본능의 표현이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그것이 내 안의 백호를 깨우는 신호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용히 묻는다.
“넌, 오늘도 네 안의 백호를 깨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