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타이거 (2021)
내가 발람이었다면,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주인을 배신하고, 자동차를 훔쳐 달아나고, 다른 도시 한복판에서 제 삶을 새로 시작하는 그 대담함을. 영화를 보고 난 첫 느낌은 그거였다.
[화이트 타이거]는 인도의 하층민으로 태어난 한 청년 '발람'이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기 위해 끝끝내 시스템을 배신하고 벗어나는 이야기다. 오랜 시간 좋은 하인으로 살아온 그는 결국 상징적인 탈주와 반역을 감행하며, 백호처럼 자신만의 길을 만든다. 이 영화는 계급과 억압, 복종의 내면화에 대해 말하지만, 동시에 모든 '닭장 안의 사람들'을 향한 질문이기도 한 거 같다.
나는 자꾸 회사를 발람이 말한 닭장과 비교하게 된다. 물론 발람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훨씬 좋은 업무환경과 더 나은 대우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비교를 하게 되는 건, 어쩌면 내 안의 욕심 때문이 아니라 나 역시 아직 열려 있는 문 앞에 서 있다는 느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결론은 “아이씨, 나는 못 했겠다.”이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익숙함 때문이다. 기꺼이 참는 법, 버티는 법, 눈치 보는 법은 이미 몸에 깊게 새겨져 있으니까.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엔 그런 말들이 너무 많아졌다.
"원래 회사는 다 그런 거야."
"어디 가도 다 똑같아."
"다들 그냥 그렇게 참고 다녀."
그 말을 제일 자주 하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들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들 중 누구도 '회사를 오래 다녀본 사람'은 아니었다. 장사를 했고, 기술을 배웠고, 일용직으로 현장을 돌아다니며 사셨다. 사대보험이 있고, 월차가 있고, 상사가 있고, 회식이 있는 '회사'는, 사실 나의 것이었다.
나는 이제 한 회사에 몸담은 지 16년 차에 접어들었다. 어느새 부모님의 조언보다도 더 긴 시간 동안 회사라는 사회를 경험해 버린 셈이다. 그런데도 아직 모르겠다. 그 말들이 정말 맞는 말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어른들의 막연한 믿음이었는지. 참고 다니다 보면 언젠가는 편해지는 날이 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참고 살다 보면 그게 어느 순간 '사는 게 이런 거지'라고 여겨지게 되는 건지.
회사는 정말 참고 견디면 버틸 수 있는 곳일까? 그 인내의 끝엔 정말 어떤 보상이 있는 걸까. 아니면 단지, 그 인내 자체가 우리의 생계를 유지해 주는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에,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아이가 있고, 대출이 있고, 나이도 있다면 참는다는 건 단지 미덕이 아니라 운명인거 같다. 참는 사람은 약한 사람이 아니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달래 보지만, 그 위안이 정말 진실인지 가끔은 의심이 든다.
발람의 할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그 계급 안에선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향이었기 때문에. 돈을 버는 손자, 주인에게 잘 보이는 손자, 말없이 참고 견디는 손자가 그들에겐 자랑이자 희망이었을 것이다.
때로는 우리 부모님도 떠오른다.
"어딜 가도 다 똑같아." "그냥 참고 다녀."라고 말하던 부모님의 목소리가 자꾸 떠오른다.
어릴 땐 그 말이 답답했고, 점점 나이 들며 그 말이 슬퍼졌다. 이제는 이해한다. 그들도 살아남는 법을 나름대로 전수하려 했던 것뿐이라는 걸.
하지만 동시에, 그들이 물려준 그 믿음을 내가 다시 내 아이에게 전하는 건 망설여진다. 세상은 여전히 만만치 않지만, 그 믿음이 유일한 해답은 아니었다는 걸, 이제는 경험으로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다짐해야겠다. 아이들에게 한계를 먼저 말하지 않겠다고. "참고 버텨", "그건 어려워" 같은 말은 조금 더 뒤에 꺼내겠다고.
하지만 동시에 두려움도 있다. 자신의 한계를 전혀 모르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는 걸. 세상은 만만하지 않고, 공평하지 않고, 운도 늘 따라주지 않는다.
나는 그 틈에서 흔들린다. 무조건 괜찮다고 말하는 것도 두렵고, 괜찮지 않을 거라고 먼저 말하는 건 더 슬프다.
발람이 마침내 닭장을 깨고 나왔을 때, 그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를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가 닭장 안에 남아 있었다면, 또 다른 고통이 그를 갉아먹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다. 어느 쪽이 정답인지.
다만, 아이에게는 언제나 선택지가 열려 있다는 것만은 말해주고 싶다. 나아가도 된다고, 나아가고 싶다고 말해도 된다고. 그리고 혹시라도 되돌아오고 싶다면, 그 길은 여전히 열려 있을 거라고.
발람은 ‘좋은 하인’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자존심도, 꿈도, 감정도. 그리고 결국, 자신의 선택으로 가족 전체가 몰살당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맞는다.
그 장면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묵직해졌다. 매정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냉정하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족은 '돈을 벌어오는 존재'로서만 자신을 바라보았고, 그 외엔 어떤 존중도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어쩌면 발람의 선택은 감정의 단절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강요당해 온 효와 희생의 굴레에 대한 절단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가족을 부양하는 것, 그것이 정말 도덕적인 선택일까. 그 선택을 거부한 발람을 우리는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면,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생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을 뿐일까.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침이면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 허둥대고, 회의 시간에는 말보다 표정을 살피고, 퇴근시간이 다 된 시곗바늘에도 눈치를 보는 나. 가끔은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도 모르겠는 날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복잡한 감정이 스며들었다. 발람에게 자꾸만 나를 이입하게 되었고, 나는 과연 저 자리에 있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했다. 그는 끝내 도망쳤고, 나는 매일 출근한다. 그는 칼을 들었고, 나는 회의실 문을 연다. 선택의 무게는 다르지만, 어쩌면 본질은 같았는지도 모른다.
발람은 이렇게 말한다.
"닭장은 문이 열려 있는데, 닭들이 나가지 않는다."
그 말이 자꾸만 맴돌았다. 우리는 어쩌면, 나가지 못하는 게 아니라 나가도 되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래도 참고 버텨야 하지 않을까?"
이 질문엔 아직도 나는 쉽게 답하진 못하겠다. 하지만 오늘도 생각한다. 이게 정말 ‘참아야만 하는 일’인지, 아니면 ‘그저 그렇게 믿어온 일’인지.
출근길이면 어김없이 지하철에 오른다. 비슷한 시간, 비슷한 칸, 비슷한 사람들 틈. 무표정한 얼굴들 사이로 나도 그중 하나가 된다. 메일함을 정리하고, 회의실 문을 열고, 조용히 퇴근한다.
그렇게 하루가 흐른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엔 평온한 하루였지만, 마음 한편엔 묵직한 감정이 남는다.
영화를 보고 며칠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발람이 떠오른다. 그의 선택과 나의 현실, 그의 칼과 나의 키보드, 그의 도망과 나의 체념.
그는 뛰쳐나갔고, 나는 남아 있다. 아직 나는 닭장 안에 머무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닭장 밖으로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화이트 타이거]는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회사생활을 이어가는 나에게 많은 생각을 던져준 영화였다. 발람의 탈주는 나에겐 하나의 상상이고, 현실은 언제나 무겁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를 통해 작게나마 통쾌함, 해방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닭장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조금은 숨통이 트인다.
지금 초라해 보이는 이 글을 쓰고, 회사 밖에서 작은 활동을 시도해보는 내 몸짓은, 어쩌면 그와 닮은 본능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아주 작고 보잘것없더라도, 그것이 내 안의 백호를 깨우는 신호라고 믿고 싶다.
이렇게 투정 섞인 글이라도 쓰고 나니 속이 조금 후련해지고 마음도 편해진다. 만약 10년 전, 그 이전에 발람을 만났더라면 나는 달라졌을까? 지금보다는 더 용감했을까, 아니면 더 쉽게 체념했을까.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제라도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내가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조용히 묻는다.
“넌, 오늘도 네 안의 백호를 깨웠니?”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