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귀근(2007)
누군가 그랬다.
"결혼하고 가족이 생기면 친구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스무 살엔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서른 즈음엔 반쯤은 거짓말 반쯤은 비슷한 거 같았다.
마흔을 넘긴 지금은, 문득 어떤 날엔 그 말이 정답처럼 들린다.
퇴근길 신호등 앞에서 메시지를 주고받던 친구,
금요일마다 맥주 한 잔을 핑계로 만나던 친구.
주말 아침마다 축구공을 같이 쫓던 친구.
나와 그들은 새로운 동반자가 생기고, 아이가 생기자
조금씩, 그러나 분명하게 멀어졌다.
그렇게 멀어진 것들을 생각하던 어느 밤,
오래전 영화 속을 느릿하게 굴러가던 타이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중국의 장양 감독이 연출하고 자오번산이 주연을 맡은 영화 [낙엽귀근]은 얼핏 보면 유쾌한 로드무비처럼 시작된다. 장양 감독은 얼마 전 내가 썼던 [영혼의 순례길]을 연출한 인물이기도 하다.
영화는 동북지방의 건설 노동자 ‘자오’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친구 ‘리’의 시신을 그의 고향까지 직접 데려다 주기로 마음먹으며 시작된다. 시신을 관이 아닌 타이어에 실은 채, 망가진 트럭과 함께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여정.
'낙엽은 뿌리로 돌아간다'는 말처럼,
죽은 이가 고향에서 잠들 수 있도록
마지막 길을 함께하는 이야기.
그 여정은 어쩌면,
살아 있는 자가 뒤늦게 지켜내는 우정에 대한 기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영화가 그려낸 것은 우정만이 아니다. 자오와 리는 중국 사회의 또 다른 이면, 바로 '농민공'이라는 존재를 상기시킨다.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수천만의 농민공들은 언제나 '임시의 삶'을 산다. 도시에서 일하지만, 정작 도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 그들은 도시의 기반을 지탱하면서도 도시인이 아니다. 영화 속 자오의 여정은 그래서 더 슬프다. 그는 친구의 시신을 옮기고 있지만,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 여정을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지나치는 수많은 얼굴들이, 사실은 매일의 고향을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낡은 트럭보다 오래 삐걱거리는 마음속에 남는다.
더불어 영화에는 농민공뿐 아니라 바가지 상인, 위조지폐, 강도단, 불법 매혈 같은 중국의 어두운 현실도 아무렇지 않게 녹아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모든 장면이 불편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왜일까. 영화는 현실을 묘사하되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유머와 따뜻함, 그리고 인간적인 시선으로 고단한 풍경을 덮어버린다. 게다가 정부나 공공기관은 방해자가 아니라 오히려 조력자로 그려진다. 현실을 비껴가듯 그려내는 이 방식은 체제 비판으로 해석되기엔 모호하고, 어쩌면 의도적으로 그렇게 연출했는지도 모른다.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사회의 어두운 단면들이 등장했음에도, 이 영화가 별다른 논란 없이 검열을 통과했다는 건 도리어 의문이다.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으면 괜찮다는 것인지, 아니면 체제는 그대로 두고 사람만 따뜻하게 그리면 용인되는 것인지. 중국이란 나라는 도통 모르겠다.
그리고 재미있는 건 영화 중반, 자오가 우연히 마주친 산적 두목이 영화의 제목을 직접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는 뜬금없이 철학적인 얼굴로 “낙엽귀근이란 게 뭔 줄 아냐? 나뭇잎은 떨어져도 결국 자기 뿌리로 돌아가려는 법이지”라고 말한다. 느닷없는 장면이지만, 그 투박한 입에서 나온 말이 이상하게도 영화 전체를 관통한다. 죽은 자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도 늘 마음의 귀향을 품고 있다는 걸 이 영화는 그렇게 불쑥 말해준다.
그 장면을 보고 있자니, 몇 해 전 미국으로 이민 간 친구가 떠올랐다.
죽은 친구를 고향으로 데려가는 영화에 멀쩡히 살아 있는 친구를 끌어오는 게 좀 미안했지만, 이 녀석도 요즘은 고향을 꽤나 그리워하고 있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와 나는 가족에게도 하지 못할 말을 서로에게는 털어놓곤 했다.
술잔만 앞에 놓이면, 무슨 말이 그리 많은지 아저씨 둘이 밤새 떠들었다.
새벽녘까지 같은 술잔을 기울이던 밤들이 아직도 또렷하다.
친구의 아내는 미국인이었고,
결국 친구는 아내의 나라로 삶의 거처를 옮겼다.
내가 알던 그 골목, 그 양꼬치집, 그 곱창집이 더는 그의 배경이 아니게 된 것이다.
처음엔 종종 연락이 왔다.
사진도 보내고, 미국 본토의 햄버거와 스테이크 같은 걸 자랑했다.
그러다 어느 날,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야, 나 향수병이 오지게 왔다.
당분간 좀 잠수 탈게.
그냥, 한국 관련된 거 보면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 뒤로는 조용했고, 그 마음을 이해하려 나도 1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그 녀석의 와이프가 내게 살짝 알려주었다.
“아직도 우울해해요. 친구들도 보고 싶어 하고 한국에 가고 싶은가 봐요.”
그래서 나는 매주 안부를 보낸다.
항상 내가 일방적으로 보내는 메시지였다.
욕 한 마디 끼워 넣은 짧은 메시지.
“살아는 있냐, ㅅㅂㄴ아.”
그건 반쯤 농담이고, 반쯤 기도다.
그놈이 멀리 서라도 잘 버티고 있기를.
그리고 언젠가는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별것도 아닌 얘기로 밤을 새울 수 있기를.
이런 관계가 과거형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좋은 친구였지.”가 아니라,
“좋은 친구다.”로 남기를.
영화는 시작부터 ‘끝’을 향해 간다.
죽은 친구를 고향으로 데려가기 위한 여정.
그 길은 지리적인 거리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가 감당해야 할 ‘마음의 거리’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속고, 의심하고, 웃고, 울면서도
시신이 담긴 타이어를 결코 놓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 지키지 못한 어떤 마음을,
이제라도 지키려는 듯이.
그 모습이 마음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왜 늘,
떠난 사람을 떠올릴 때 비로소 ‘좋은 친구였다’고 말하게 되는 걸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에게는 왜 그 말을 건네지 못할까.
마흔이 넘으니 관계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
맘 편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걸 알게 된다.
같은 지붕 아래 사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은 할 수 없고, 어떤 마음은 꺼내기 어렵다.
그런데 친구에게는, 그게 가능하다.
“나 오늘 좀 견디기 힘들어.”
“나 요즘 나라는 사람이 싫어졌어.”
그런 말들을 부끄럽지 않게 꺼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말을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인지
영화 속 여정은 ‘반환’이 아니라 ‘회복’처럼 느껴졌다.
살아 있을 땐 모르고 지나친 우정의 무게를,
죽음 이후에야 알아버린 자의 늦은 귀향.
어른이 된다는 건,
함께했던 사람들과의 거리를 받아들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멀어졌다고 해서 미워진 건 아니고,
잊었다고 해서 덜 소중했던 것도 아니다.
[낙엽귀근]은 그 마음을 다시 열게 한다.
비록 이미 식어버린 타이어 안의 친구라도,
끝까지 데려가겠다는 마음.
그 침묵과 고단함,
그리고 무너질 듯 흔들리면서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얼굴이
오래도록 가슴 한구석을 두드린다.
누구보다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것들을,
한참 떨어져 있던 친구에게는
묵묵히 꺼낼 수 있다는 것.
나뭇잎은 뿌리를 찾아 돌아간다.
사람도, 그렇게
각자의 고향을 품은 채 누군가의 마음속으로 돌아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