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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한입 찬가

콩국수 찬가

인천 마루메밀국수, 명인콩국수 콩국수

by 바삭새우칩

'여름메뉴 콩국수 개시'


식당 출입문 옆에 걸린 임시 메뉴판에서 그 문장을 발견하는 순간, 나는 본격적인 여름이 왔음을 느낀다. 진정한 여름의 음식은 냉면이 아니라 콩국수가 아닐까. 냉면은 겨울에도 종종 떠오르지만, 콩국수는 여름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찾게 되지 않으니까.


어릴 땐 그 국수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뿌옇고 텁텁한 국물은 입에 착 감기지도 않았고, 면발은 밍밍하게만 느껴졌다. 밥상머리에서 등짝 스매시를 피하려고 억지로 젓가락을 들었고, 결국은 설탕을 듬뿍 넣어 겨우 삼켜냈다.

우리 집 아이들도 지금은 콩국수를 싫어한다. 어릴 적 내 모습 그대로다.
혹시 아이들이 싫어하는 음식에는 어른들은 느낄 수 없는 아이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향, 맛 같은 게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반대 일까.
언젠가 이 아이들도 콩국수를 한 모금 마시며 여름을 삼키는 순간이 오겠지. 그 순간을 조용히 지켜보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싫어하던 콩국수가, 어느 순간부터 여름의 위로가 되었다.
이제는 설탕 대신 적당한 굵기의 소금을 넣는다. 너무 고운 소금을 쓰면 안 된다. 어딘가 텁텁하고 걸쭉한 콩물에 소금을 조금씩 뿌려가며 간을 맞춰야 제맛이 난다. 휘휘 저은 뒤 그대로 한 모금 마셔야 한다. 녹지 않은 소금 알갱이 하나가 혀끝에서 짭짤하게 터질 때, 콩국의 구수함과 어우러지며 감칠맛이 폭발한다. 그 한 모금의 깊이 덕분에 콩국수는 단순한 면 요리 그 이상이 된다.


고명으로 삶은 계란 반쪽이 올라와 있다면, 나는 혹시라도 노른자가 콩국에 스며들까 얼른 집어먹는다. 담백한 흰자와 퍽퍽하지만 고소한 노른자. 애피타이저로서는 괜찮지만, 솔직히 담백한 콩국수에는 꼭 어울리는 고명은 아닌 것 같다.


면을 건져 올릴 때는 꼭 배추김치를 곁들인다. 김치의 매콤하고 새콤한 결이 콩물의 고소함을 밀어 올려 준다. 채 썬 오이는 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조연 같은 존재다. 하지만 가끔은 그 상큼함이 입안을 정리해 주는 역할을 한다. 콩의 무게감 사이사이를 파고들며 짧은 상쾌한 숨을 불어넣는다. 첫 입은 국물 먼저, 두 번째는 김치와 함께한 면. 세 번째쯤에는 묵직한 콩국의 고소함과 면의 담백함, 김치의 매콤 새콤함이 어우러지며 본격적인 식사가 시작된다.


내가 여름마다 즐겨 찾는 콩국수집은 두 곳이다. 하나는 인천 동춘동의 마루 메밀국수, 다른 하나는 인천시청 앞 명인콩국수다.

동춘동 마루 메밀국수는 여름이면 가게 앞에 장단 콩자루가 쌓여있다. 직접 삶고 거른 콩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집은 메밀국수 전문점답게 콩국수도 메밀면이다. 고소하고 묵직한 콩국에 쫄깃하면서도 부드러운 메밀면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건강+건강’의 조합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국물도 꽤 진한 편인데, 시원하게 마시기 좋고, 한 입 먹고 나면 속까지 정갈해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양도 넉넉해서 다 먹고 나면 배가 터질 듯 부르다.

그리고 인천시청 명인콩국수는 이름부터 콩국수에 진심인 집이다. 이 집에 다른 메뉴가 있었나? 팥국수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나는 늘 콩국수만 먹는다. 이곳의 콩국수는 콩국수라기보다 콩 비빔국수에 가깝다.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할 만큼 걸쭉하고 진득하다. 콩의 고소함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할까. 면에 국물이 찰싹 붙는 느낌도 좋지만, 사실상 국물 한 숟갈만으로도 한 그릇을 다 먹은 듯한 포만감을 준다.

두 집 모두 훌륭하지만 방향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시원하고 담백하게, 다른 하나는 진하고 묵직하게. 그래서 더 좋다. 콩국수가 얼마나 다양한 얼굴을 가졌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물론 식당에서 콩국수라 해놓고 시판 콩국이나 두유에 볶은 콩가루를 타서 낸다면, 인위적인 단맛 때문에 금세 눈치채고 실망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집에서 직접 해 먹기엔 그 정도만 되어도 괜찮다. 집집마다 콩을 삶아 맷돌에 갈아낼 순 없으니까.


나는 여름이면 콩국수를 즐겨 먹는다.
뜨거운 바람이 불고, 미지근한 그늘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오후의 어느 날.
고소하고 시원한 콩국 한 모금에 잠시 더위를 잊는다.


짠맛과 고소함이 입안에 퍼지고 나면, 그제야 여름 한복판에 내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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