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끝자락에서
요즘 포기가 쉬워진다. 사실 포기보다는 비겁하게 도망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물론 그 순간마다 쉬웠던 건 아니었다. 선택은 어렵지만 늘 그렇듯 후회는 쉽기 때문에 머릿속으로 보다 나은 차선책이 뭔지 오만가지 미래를 그려보며 보다 나은 선택을 골라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선박기관사라는 직업을 포기했다.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올 때 곁에 내가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연락 한 통 잘하지 않는 못난 아들이지만 먼바다로 자식을 보낸 부모 마음 아프 듯, 길면 12개월 짧으면 6개월 만에 만나 해가 갈수록 늙어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는 자식의 마음도 아프다. 그러면서 가족이라는 집단이 내 마음속에 단단하게 뿌리내렸다. 미래에 내가 꾸릴 가정을 위해서도 하루빨리 때려치우는 게 낫겠다 싶어 도망쳤다.
첫사랑으로부터 도망쳤다. 5년이라는 시간을 교제했었지만 승선 생활로 떨어져 있었던 기간이 합치면 3년이 넘는다. 함께하는 안정적인 미래를 원하는 여자친구였지만 오랜 선상생활로 형체도 모르게 사라진 자아를 찾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다. 서로 미워서도 아니고 권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서로의 입장을 너무도 잘 이해하기에 그렇게 헤어졌다. 헤어짐이 있고 난 뒤 1년 정도 지나서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렇게 첫사랑으로 남게 됐다. 그렇게 나를 위해 사랑을 포기했다.
적성을 찾기 위해서 다방면으로 무턱대고 뛰어들었다. 이용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경력을 쌓기 위해 바버샵에서 일을 했다. 그때 당시에는 바버로써의 경력보다는 추억을 쌓고 싶어 퇴근길에 해외 봉사활동 서류전형 합격 문자를 받고 다음날 바로 그만뒀다. 경력이라고 말도 못 할 만큼 하루짜리 경험이지만 손님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그 가게에서는 배울 게 없겠다 싶었다. 일은 못해도 인성은 올곧아야 한다는 곤조가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손님을 하나의 돈으로만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과 저명한 미용계 텃세를 경험하고 하루 만에 포기했다.
해외에서 경력을 쌓아 보자 싶어 호기롭게 아일랜드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났다. 열심히 이력서를 돌렸고 면접을 봤지만 하나같이 경력자를 원했고 얼마 안 가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했다. 유학이든 워홀이든 아일랜드에 있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방문 이발을 시작했다. 경력이 없어서 그런지 가난한 유학생들이 대상이라 그런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없었고 악랄한 월세와 생활비를 위해 결국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이, 미용을 포기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는 키친 포터 일을 구할 수 있었지만 포기했다. 한식당이라서 영어를 늘릴 수도 없었고 먼 나라까지 와서 주방에 박혀서 설거지만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하도 일이 안 구해지니 브런치 카페에 키친 포터로 취직이 됐지만 역시 코로나 때문에 출근해보지도 못하고 강제 포기가 됐다.
한인마트에서 운 좋게 일을 시작했고, 또 몇 달 안가 도망쳤다. 역시 자주 쓰는 한국어가 문제였다. 외국인 직원도 있는 한식당에 취직을 했다. 요리하는 것도 재밌었고 배울게 많은 사장님 밑에서 팀원들과 좋은 분위기로 일을 했다. 월급도 괜찮게 받았으며 복지도 좋았다. 근데 또 도망쳤다. 소방공무원이 되고 싶어 져서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었다. 귀국 전에 한, 두 달 정도 놀다 가려했는데 운 좋게도 스타벅스에서 일할 기회가 생겨 한 달 넘게 일하다 시간을 더 끌면 안 될 것 같아 도망치듯 귀국했다.
계속해서 도망치고 있는 인생이다. 업무환경과 진급을 할수록 늘어가는 책임감으로 인해 극도로 예민해지다 너무 많은 스트레스를 받아 선상생활로부터 도망쳤다. 3년을 기다려준 사랑했던 여자 친구였지만 결혼이라는 압박이 싫어 그녀로부터 도망쳤고, 바버로 경력을 쌓고는 싶지만 하대 받는 환경이 싫어 도망쳤다. 코로나 때문에 아일랜드에서 도망쳤고, 그토록 원했던 직업이고 이뤄낸 소방공무원에서 도망치고 싶다.
뭔가를 시작할 땐 열정적이다. 그러다 단기간에 활활 타버려서 새까맣게 남은 재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다시 타오르고 싶은데 막연하기만 한 청춘의 끝자락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