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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May 13. 2020

카메라는 언제나 왜곡을 낳는다

영화 <아이 엠 히스 레저>

그가 죽었다


 히스 레저가 죽은 뒤 12년이 흘렀다. 가늠하면 꽤 긴 시간이지만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다크 나이트 Dark Night>는 거대 흥행작이었고 그중 조커를 연기한 그를 둘러싼 후문이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소문을 통해 그의 실제와 가까워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간과하기 쉽지만 사람이란, 얼굴 맞대고 지내도 다 알기 어려운 모호하고 신비로운 동시에 개별적인 존재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나온 다큐멘터리는 그의 실제와 얼마나 가까울까?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느끼는 감정이 그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지는 아닐까? 어떤 게 진실된 애도이며, 또 어떤 것이 실제와 가장 가까운 걸까? 잡다한 생각들로 영화에 크게 기대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던 건 지금 생각하면 좋은 작용이 되었다.

 이 영화를 지금에야 관람했다는 사실로, 당신은 내가 히스 레저의 대단한 팬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의 죽음을 약간은 동경하는 축에 속하는 평범한 관객이자 예술가 지망생에 속한다. 왜냐하면 완벽한 때의 완벽한 죽음이란, 클라이맥스와 결말이 완벽한 한 편의 이야기가 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지 완벽한 끝만이 완벽한 이야기를 만든다고 말한다면, 나는 스토리텔링을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할 것이다. 히스 레저의 삶의 자취가 전달해 준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었다. 결말이 어떻게 되든, 지금을 생생하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세 줄 요약


 히스 레저의 죽음 10주년을 맞이해 애도의 의미로 제작된 본 영화는 주변인들의 인터뷰와 생전 고인의 작품 및 비하인드 영상, 그리고 고인이 찍은 셀프 비디오로 구성되어 있다. 삶의 일대기를 따라가는 여정으로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니지만 무엇보다 스크린으로만 봐왔던 그를 좀 더 면밀하게 관찰함으로써 실제 삶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을 것이다.


 죽음이 주는 고요한 느낌을 좋아한다. 누군가를 애도하는 시간만큼은 차분함이 미덕이 되고, 침묵이 허용된다. 생과 사 사이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공간에 둘러앉아 만나고, 인사를 하고, 밥을 먹는 광경은 죽은 이의 사진이 걸린 이질적 공간을 통해 순환되고 있다. 한 명씩 나와 그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그는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넘치는 사람이었어요. 그는 세상을 구경하고 싶어 했고, 실제로 돌아다녔어요. 그는 자신이 연기를 할 거라는 걸 알았고, 배역을 따냈죠. 각자가 생각하는 그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차례로 지나간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사람처럼 말하곤 했어요. 이 말을 필두로 그들은 그의 죽음을 상기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를 둘러싼 풍문과 거짓 소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들은 탄식한다. 죽음을 그저 죽음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 남겨진 주변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이들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충고하고 나면, 다시 히스를 추억하는 조용한 시간으로 되돌아간다. 이제는 영화도, 추억팔이도 마무리할 시간이다. 그의 사진과 비디오 몇 개가 몽타주로 흘러나오고, 그의 연대기에 종지부가 찍힌다. 그제야 죽음은 끝을 의미한다는 걸 깨닫는다.

 다큐멘터리 영화란 대체로 벌어진 사건에 대한 견해를 담기 마련이다. 본 영화는 기본적으로 애도의 성격이 가장 강하지만, '스타의 죽음'이라는 키워드 아래 그를 둘러싼 무성한 소문에 일침을 가함으로써 한 현상에 대한 견해를 묵묵히 담아내고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는 일부러 특별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죽음과 애도란 무겁게 다뤄져야 마땅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거운 주제로 비극적 서사를 이끌어내는 대신 영화는 그의 가치관과 삶을 반추하는데 힘을 실었다. 무엇보다 '히스 레저답다.'는 말을 자아내는 그의 비디오테이프들이 가득 실린 것이 이 영화의 리듬감을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비디오, 영화,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몇 번이나 왜곡되었지만 관객들은 왜곡을 눈치채기 힘들었다. 그가 직접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언제나 왜곡을 낳는다


 뛰어난 연기자로서 활약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카메라를 든 사내였다. 무엇이든 찍고 기록하는 것을 즐겼고 이후에는 직접 뮤직비디오 필름이나 단편 영화에 도전하기도 했다. '과거에 둘러싸여 있지만 계속해서 다음 순간을 기록하고, 기록하고, 기록하는 사람.' 영화의 한 장면 중 이런 게 있다. 그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흑백 필름 속, 조명을 들고 자신을 비추는 히스의 모습이 보인다. 공간은 집, 시간은 늦은 밤이다. 마치 영웅이 칼을 거머쥔 듯 굳센 몸짓으로 조명을 자신에게 비추며, 당당하게 맞서고 있는 그의 모습. 그가 찍는 피사체는 한정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그는 그 자신을 찍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수많은 카메라에 찍힌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보려고 했다. <브로크백 마운틴>을 함께 찍었던 이안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신은 원래 배우들이 프레임 안의 모습을 확인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히스가 말없이 다가와 카메라를 확인할 때면 그대로 두었고, 몇 번 싫다고 말했지만 듣지 않는 그의 모습에 포기했다. '배우를 할 거야'라고 말한 뒤 덥석 기회를 잡고, '붙을 것 같다'라고 말한 뒤 덜컥 붙어버리는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카메라를 늘 곁에 두고 카메라 안의 자신과 인사를 나누었다.

 왜 자신을 찍고 확인하는가? 나는 이것을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인간의 몸짓으로 보인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의미를 정의하곤 한다. 그리고 의미를 위해, 혹은 의미를 향해 끝없이 말하고, 행동하고, 움직인다. 모두가 의미가 완성된 멋진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멋진 마지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멋진 삶이 필수적이다. 순간이라는 매우 촘촘한 단위로 세었을 때, 우리의 모든 삶이 멋질 수 있을까? 우리 삶의 감시자는 언제나 나 자신뿐이고, 때문에 내가 보는 순간들이 나의 삶을 구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온전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에, 혹은 온전하지 않은 자신을 부정하고 싶기 때문에 외부의 매개체로 자신을 계속 확인하고 더듬는 것이다. 스스로 매일 듣고, 만지며, 맡는 자신보다 외부로부터 체험되는 자신을 더 보려고 한다. 존재하면서도 존재를 확인해야 하는 존재. 살아있다는 느낌을 매개체로부터 전달받아야만 살아있다는 걸 깨닫는 존재. 인생이 단순하지 않으니, 존재가 복잡해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존재를 향한 무한한 갈망은 언제나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그것을 추구해야만 할까?

 카메라는 언제나 왜곡을 낳는다. 왜곡이 가득한 매체를 통해 그가 가진 무한한 에너지와 창의성을 온전히 보았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조차도 자신을 모두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통해, 다른 어떤 작품들을 통해서도 그를 완전히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본질은 언제나 태도에 있다. 그가 어떻게 살기를 원했으며,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탐구했는지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카메라 안과 밖에서 그가 했던 모든 것은 나약한 존재의 굴레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했던 그의 탐구 열정을 가늠케 한다. 그가 자신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어떻게 찾아 나가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것마저도 왜곡이 가득하기에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코끼리의 앞발을 더듬는 것이다. 나약한 인간들의 자화상으로서 그는 충실히 카메라 앞에 섰고 담겼다. 그의 열정이 주는 감동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작은 파동을 만들어 낸다.


애매한 결론


 남의 인생에 대해 쓰는 건 쉽지 않다는 걸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편하게 마음먹자 생각했지만 글이 조금 무거워지고 말았다. 남의 죽음이 무거워지는 건 동류로서의 책임감일지 혹은 나 자신의 예견된 죽음을 향한 조심스러움일지 모르겠다. (나도 언젠가 죽을 거니까, 누가 내 죽음에 대해 조심스럽게 써줬으면 하는 마음인 걸까...) 하지만 내가 즐거운 마음으로 보았던 것처럼, 독자들도 이 영화를 즐겨 주었으면 좋겠다. 의미를 찾으려는 얄궂은 마음은 내려놓아도 좋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면 된다. 그는 결코 우리를 고뇌와 슬픔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니 그가 시원하게 던져주고 간 생생한 열정 같은 것들을 그저 만끽하면 된다. 그의 멋진 삶과 죽음을 온 힘을 다해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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