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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May 26. 2020

네가 가라고 하면 나는 갈 거야

영화 <짐승의 끝>

인생 놀음


 사는 게 요지경이라지만 세상은 여전히 멸망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자신만의 말투로 세계의 마지막을 감히 추측하는 사람이 있다. '조성희'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도 많겠지만, 영화 <늑대소년>은 대부분 들어봤을 것이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안다. <늑대소년>의 그 조성희 감독이 엄청난 단편영화와 데뷔작을 찍은 전적이 있다는 것을. 단편 <남매의 집> 이후 발표된 그의 졸업작품이자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은, 현실적인 공간에 인물을 설치해두고 극을 서서히 진행하며 결국 디스토피아 세계관으로 끌고 가는 영화다. 장르를 정하기엔 다소 애매한 감이 있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만을 칭하는 장르가 있다면 조성희는 단연 그 장르를 씹어먹는 괴물이 분명하다. 여기서 괴물이라는 말은 굉장한 칭찬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가 찍는 영화들이 정말로 무지막지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과거형으로 말해야겠지만 그 사정이야 이따가 더 자세히 얘기하기로 하고, 당신이 끌려서 들어온 제목부터 찬찬히 살펴보자. 어쩌면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 "네가 가라고 하면 나는 갈 거야, 갈까?"


세 줄 요약 #스포 주의

아래부터 전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영은 출산을 앞두고 고향에 내려가는 중이다. 택시에 동승한 남자는 묘한 긴장감을 주지만 순영은 그를 무시하고 얼른 내려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순간 강한 빛과 함께 정신을 잃게 되고, 정신을 차려보니 전체 정전 상태의 시골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모든 것과 단절된 곳에서 유일하게 무전으로 순영과 통신을 하는 그 남자는 누구일까.


 당신은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있는가? '아, 이 장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 혹은 '우리 저번에도 이런 적 있었는데.' 당신은 기억을 더듬다가 문득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걸 깨닫는다. 분명 기억이라고 생각했는데 뇌가 만들어 낸 환상에 불과했을 때. 당신은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찝찝함을 느낄 것이다. 조성희 감독은 그 찝찝함의 맛을 제대로 우릴 줄 아는 감독이다. 희한하게도 그가 설정한 영화의 공간과 시간에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 장소는 인물들이 보는 지도에도 있는 실제 장소이고, 조금만 가면 주유소가 나오는 시골 바닥이다. 시간은 인적이 드물 뿐 사람들이 종종 다니는 고요한 한낮. 이 영화가 만드는 공포는 순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은 아니다. 시공간의 아주 작은 균열을 숟가락으로 서서히 파는 느낌이랄까. 순영은 전화를 빌리려고 동네를 돌아다니고, 소년을 만나고, 차가 멈춰 발이 묶인 커플을 만나며, 주유소까지 데려다주는 아저씨를 만난다. 그들은 분명 평범한 사람이다. 그들은 적당히 이기적이고 또 이타적이며, 순영과 같은 처지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낯선 면모가 단숨에 드러날 때. 사실은 그들이 낯선 사람이었다는 것이 피부에 와 닿을 때 우리는 공포를 느끼고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순영에게는 그 남자가 준 무전기에서 들리는 소리가 여간 반가울 수 없다. 그는 조금이라도 덜 낯선 사람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결정적인 순간에 순영에게 무전을 치며 순영이 겪는 상황에 대해 훈수를 둔다. 하지만 사실 제일 이상한 건 그 남자다. 왜냐하면 순영이 갑작스러운 잠에 빠지기 전, 택시에서 나눈 대화에서 그는 순영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신이다. 그는 모든 곳에 존재하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


 예수의 탄생 설화는 단순하다.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가 잉태되고, 그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평생을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데 사용된다. 그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십자가 처형을 받을 때 그는 말한다.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뜻을 이행하던 그였지만 아버지의 냉정함 앞에 좌절을 맛본다. 본 영화, <짐승의 끝>은 제목에서도 시인하듯 '짐승' 그러니까 인간의 끝을 다루고 있다. 그들이 인생 앞에 좌절하고 힘겨워했던 것, 어쩔 수 없어서 이기적으로 행동했던 것 모두 신은 알고 있다. 알고 있다고 직접 말을 한다. 그러나 나만을 사랑하는 신이 아니기에, 그는 끝을 위해 모든 것을 앗아가고 순영으로부터 아이까지 데려가버린다. 이 신랄한 비유로 이루어진 영화는 기독교 사상을 접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읽히지만, 문외한이라면 뜬금없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필자의 감상에 따라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예수의 탄생 설화에서 모티프만 차용했을 뿐, 신의 태도 면에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짐승의 끝>의 신은 냉정하면서도 직관적이다. 희생양을 고를 때 사다리 타기를 하는 그는 논리적, 도덕적 이유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데에서 이유를 찾는다. 마치 그를 주관하는 운명이 따로 존재하는 듯 말이다. 또한 신은 자애롭다. 그는 모두를 이해하고 아끼고 사랑한다. 때문에 누구든 심판하려 하지 않으며, 다만 보듬어주고 보내줄 뿐이다. 모든 것을 알지만 죄를 구분하지 않는 신, 일을 집행하기만 하고 끼어들지 않는 신. 이렇게 보면 신은 과연 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능력하기만 하다. 그런데 여기, 그의 독특한 면이 하나 더 있다.


당신을 유혹하는 신


"네가 가라면 나는 갈 거야, 갈까?"


 영화의 명대사로 꼽히는 이 문장은 사실상 실마리라던가, 인과가 존재하지 않는 영화 내용에서 유일한 실마리로 꼽을 수 있는 장면이다. 감독은 순영이 그를 받아들이고 정사를 나눈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냥 끌려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 말을 현실에 굳이 대입해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모양새로 보자면 남자가 여자 방에 다짜고짜 들어와 강간을 하는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자가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너도 즐겼잖아" 식의 개논리가 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온통 신화적 이야기의 비유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장면은 이렇게 읽을 수 있다. '그는 어쩐지 당신에게만 다른 신.'


 어디서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연애를 할 때 우리는 상대에게 이런 점을 가장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 사람 좀 못됐는데 나에겐 친절해. 혹은, 그 사람 좀 착한데 나한테는 툴툴거려. 섹시한 줄 알았는데 귀여워. 아니, 귀여운 줄 알았는데 섹시해. 나만 아는 그 사람의 다른 면모를 보면 우리는 그와 강력한 친밀감을 경험하게 되고 특별함을 느낀다. 신과 있었던 일을 나중에야 기억한 순영은 그에게 묻는다. "당신 내 방에 왔었지." 신은 아이러니 하게도, 순영과 하룻밤을 보냈고 무전기를 쥐어주었으며 위기에 처했을 때 구해주는 인물이다. 순영은 그에게서 구원 비슷한 것을 구하게 된다. 여기서 꺼내 달라고, 이 지옥에서 나만 구원해달라고 매달리게 된다. 그런데 신이 반응하지 않자, 순영은 무전기를 버리고 무거운 몸과 아픈 다리를 이끌며 스스로 구원을 향해 걸어 나가기 시작한다. 그 여정의 가운데 순영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되고, 업보를 받으려는 순간 신에게 또다시 도움을 받게 된다. 모든 타인들이 사라지고, 끊임없이 걷다가 배가 너무 아파 길바닥에 쓰러진 순영은 갑작스레 아이를 낳게 된다. 그리고 그때, 그때가 되어서야 신의 목적이 드러난다. 아이를 데리고 택시를 타고 가버리는 그를 보며 순영은 깨닫는다. 신은, 아니 운명은, 아니 세상은 또다시 우리를 쓰고 버린다. 신이 나만 구원할 거라는 착각이 아찔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뭘 기대했는가.

 이 영화가 말하는 운명의 굴레는 이런 식으로 재미있는, 혹은 살짝 섬뜩한 이야기를 통해 비유적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 운명을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굴레 안에 속해있고 그것이 우리를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간과한다. 신은 질문을 던졌고 우리가 선택을 했으니 죄는 오롯이 받아 마땅한 것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답을 고르는 순간 우리는 질문 안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하필 그 순간에 그렇게 매력적인 남자였고 순영이 끌리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는 애를 써야 한다. 죽도록 애를 쓰고 다르게 생각하고 질문을 던졌다 회수하고 도망갔다 돌아오며, 끊임없이 자신을 깨려는 노력을 해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당신은 특별한 무언가가 되어 신에게 아주 특별한 질문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거짓말이다. 당신은 하나도 특별하지 않으며 쓰이고 버림받을 것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그렇다 해도 이 영화가 주는 이 모순적인 진실의 재미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나 연약하고, 사랑스럽다.


애매한 결론


 이런 류의 영화에 환장하는 필자로서는 사심을 가득 담아 쓴 리뷰일 수밖에 없었다. <남매의 집>과 <짐승의 끝>으로 조성희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늑대소년> <탐정 홍길동>으로 기억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엄청난 취향의 차이가 존재한다. 혹자는 전자가 지나치게 소모적이고 의미는 없는 단순 공포 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다른 이는 후자가 장르물에 불과하고, 상업 영화가 감독의 스타일을 망쳤다고 말하기도 한다. 전자를 전적으로 좋아하는 입장으로서 두 의견 모두에 동의하는 바이지만, 굳이 말을 덧붙인다면 조성희의 영화 세계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근 조성희 감독이 오랜만에 새 작품을 낼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발 우주 SF라니, 이번에는 전자파와 후자파 모두 취향을 제대로 저격당할지도 모르겠다. 기대를 도저히 거둘 수 없는, 실험적이고도 뚜렷한 주관의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감독의 영화 세계를 앞으로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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