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당신은 당신이 좋아하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따라가 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 부제목을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필모그래피 내의 당신이 고르는 최애작과, 객관적으로 평가된 최고작은 언제나 같지 않다. 필자는 라디오헤드의 음악을 듣길 좋아하는데, 사람들에게 라디오헤드 얘기를 하면 다들 <Creep> 이야기를 가장 먼저 꺼낸다. 하지만 라디오헤드의 팬들은 <Creep>이야말로 가장 라디오헤드답지 않은 곡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최고작을 강력하게 부정하곤 한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현재 최애곡은 <15 step>이다.- 같은 맥락으로 필자가 꼽는 박찬욱의 최애작은 언제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였다. 최고작이야 단연 <올드보이>, 혹은 <아가씨>겠지만, 그들이 내 최애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덕질하는 모든 우리네 덕후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최애는 왜 최애인가?
자해 때문에 정신병원에 들어가게 된 영군, 가지각색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만 영군은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비밀이 있다. 쥐들과 대화를 하며 싸이보그로서 힘을 얻어 할머니를 구출해내고자 하는 영군. 그런 영군의 앞에 남의 특징을 훔쳐가는 일순이 등장한다.
박찬욱의 영화 세계를 장르로 치면 다양한 축에 속하지만 화법은 일맥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유머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던지고 싶은 유머에 어떤 이야기를 끼워 넣는... 아니, 하고 싶은 이야기에 작은 유머를 끼워 넣은 듯한 독특한 감각의 세계에 퐁당 빠질 수 있다. 정신병동이라는 다소 생소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영화는, 귀여운 외모로 사람들을 유인해놓고는 사차원의 세계로 순식간에 홀려버리는 각종 인물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주인공은 영군(임수정)이고, 그의 과거사가 영화를 이끌어 가지만 결코 그것이 다는 아니다. 이 영화는 정신병을 가진 이들이 서사적인 삶을 어떻게 재구성하는 지를 세심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괄목할만하다. 세상을 보이는 대로 보고 이후에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제각기 뻗어있는 삶의 줄기와 우연한 생장을 자기 식으로 조립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임무이다. 비슷하게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처음 만나는 자유>가 떠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싸이보그'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영화는 정신병을 공포 혹은 낯선 대상으로 다루지 않는다. 그렇다고 동정심을 살만한 대상 역시 아니다. 그들 각자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것이 우선시되며, 그것을 관찰하는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각자의 서사는 우스꽝스러운 한편 굉장히 진지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이렇듯 인물들의 삶이 무척 현실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것은, 전적으로 작가로서의 박찬욱이 그것을 추구함에 있다. 표면적인 삶의 굴곡이 심할수록 유머의 강도는 더해진다. 그의 타작품이 삶의 굴곡 그래프 중 가장 아래에서 튀어나온, 일명 블랙 코미디였다면 이 영화는 가장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유머라는 점이 특별하다. 왜냐하면 남들이 어떻게 보든 일단 자기 세계 안에 있는 환자들은 현재의 상태를 병적이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갈수록(그들이 원하는 것이 꼭 병의 완치만은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세계를 더욱 확고히 구축해 나갈수록 그들의 그래프는 끝없이 위를 향한다. 이들이 사는 세상에 한 번 발을 들이면, 세상 모든 것은 관심 밖의 일이 되기 일쑤이다. 그들이 끝없이 집착하는 것 하나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면 된다.
그런데, 이렇듯 정교하고 세심하게 작업된 이 영화를 박찬욱 필모그래피의 오점, 혹은 망작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정말 그렇게 많은가? 적어도 온라인 평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다들 '숨겨진 명작' 반열에 끼워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는 영화 중 하나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잡는 감독으로 손꼽히는 박찬욱은 데뷔 때부터 자신만의 B급 감성을 주장하기로 유명했고, 실제 그가 쓴 비평이나 에세이 안에서도 그가 B급 영화 마니아라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늘 기괴함 안에 숨은 리치 알맹이 같은 유머를 추구하는 그이기에 그의 코드를 이해한다면 단연 <싸이보그>는 좀 내놓을만한 자식은 아니더라도, 제 몫은 꿋꿋이 해내는 든든한 자식이라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에 대한 저평가는 그저 괴소문에 불과하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영화가 최애작이 될만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말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JSA>, <아가씨>, <박쥐>, <스토커>를 두고도 이 영화를 꼽을 수 있다고? 그렇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조금은 아픈 손가락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표현의 의미를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들어가 보자. 왜 아파야만 더 사랑하는 손가락이 되는가? 번듯하게 잘 살고 누구나 인정해주는 최고작보다 못하지 않은데도 못한 취급을 받으니 이 영화에 더 마음을 쓰게 된다는 말 아닌가. 왜 우리의 사랑은 늘 굴곡을 전제하는가. 왜 동정심을 동반해야 굳건한 사랑으로 자리매김하는가.
어쩌면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사랑 총량의 법칙'을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모두가 사랑하는 작품은 사랑의 양이 과다하다. 마치 모두가 좋아하는 선배한테 나마저 사랑을 고백해버리는 게 쪽팔린 것처럼 말이다. 다들 외면하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하면 우선 모두와는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충분히 가치가 있지만 대부분은 알지 못하는 것, 일부에게는 멸시당하는 것. 어쩌면 이것은 최애의 필수조건일지도 모르겠다. 극 중 영군과 일순의 러브 스토리가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일순은 병원 내 모든 사람들의 특징을 훔치고 이곳저곳 쑤시는 난봉꾼이지만, 유독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영군에게 흥미를 느낀다. 사랑이 고통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은 캐캐 묵은 선입견 같지만, 때로는 그것이 정말 사실로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아픈 만큼 사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또 하나, 거기에 운명적 첫 만남까지 더해지면 그는 당신의 절대 불변한 법칙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모처럼 반차를 낸 오후 우연히 들어간 독립영화관에서 시간이 맞아 보게 된 영화가 꽤 마음에 들었다면, 당신은 그를 쉽게 잊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이렇듯 작품 외적 요소까지 한데 섞여 우리의 최애작이 결정되고 나면, 이제 당신은 이상형과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면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최애는 그런 거 안 따져요.' 잘 생각해보자. 그걸 따져서 최애가 된 건 아닌지.
그렇지만 이것을 인식했다고 해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가니 사랑하고, 사랑하니 마음이 가는 것을 어느 누가 부정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인식으로부터 출발하는 자기 성찰이 꽤 괜찮은 성과를 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최애, ' 그러니까 가장 사랑하는 것이 꼭 있어야 한다는 인식부터도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아니, 좋아하면 좋아했지, 왜 모든 분야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구분지어야 하는가? 그러니 사람들이 '운명의 연인' '마지막 사랑' 같은 것이 꼭 존재하는 것처럼 구는 것 아닐까? 사랑의 강도에도 명확한 단계가 있고 순서가 있지만, 영원불멸한 것이 될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당장 가장 좋아하는 건 <싸이보그>지만, 내일 당장 <박쥐>로 바뀌어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괜스레 나만, 운명적이고 안쓰러운 최애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나 자신만 스스로 괴로울 뿐이다.
이렇게 열변을 한참 토해내고 나면,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오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현재 중요한 것은, 그것을 사랑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사랑하는 순간이 있었다면, 그것이 지나가는 순간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지나가기 전까지는 따지지 않고 열렬히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싸이보그>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로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동정심 금지, 슬픔에 잠기는 것 금지, 죄책감 금지, 망설임 금지, 쓸데없는 공상 금지, 설레임 금지, 감사하는 마음 금지..." 어떤 것을 사랑하는 우리들은 싸이보그가 되긴 당분간 그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