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질투는 나의 힘>
우리는 남성 서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왜일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이야기가 남성 서사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오해가 생길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보통 설정값으로 둔 것을 1로 두고, 나머지를 그와 비교하여 이름 붙이곤 한다. 그러니 이름을 짓는 사람들이 남성 서사를 설정값으로 두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임과 동시에 논쟁거리가 아주 많은 인물이다. 그의 위대한 명성과 몰락은 그가 설정값을 남자로 두고 시작한 그 비극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런데 여기, 남성 서사의 정석인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여자 감독이 연출한 아주 독특한 영화가 하나 있다. 지금은 성별 분쟁의 한가운데이기 때문에 많은 작품들이 정치적, 사회적 의견을 굉장히 명확하게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2002년, 그는 어떤 마음으로 남성 서사를 담아냈을까. 박해일이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 담긴 영화, <질투는 나의 힘>이다.
원상은 같은 잡지사에서 일하는 포토그래퍼 성연에게 묘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편집장인 윤식 역시 성연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원상은 과거에 윤식으로부터 애인을 빼앗긴 전력이 있었고, 그로 인한 충동으로 그가 일하는 잡지사에 취직을 했다. 반복되는 운명 아래 놓인 원상, 그가 하고 싶은 건 복수일까, 아니면 다시 사랑일까?
박해일은 정말 아름다운 배우다. 그의 대표적인 수식어가 ‘선악이 공존하는 얼굴’ 이지만 나는 그런 걸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저 그의 얼굴이 아름답기 때문에 아름답다고 여긴다. 게다가 현장감이 느껴지는 그의 연기는 또 어떤가. ‘치기 어림’을 그처럼 잘 표현하는 배우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가 표현하는 사랑은 따뜻하고 순박하다(인어공주, 2004년작). 때로는 거칠고 투박하기도 하다(연애의 목적, 2005년작). 그리고 때로는 아이러니한 감정 아래 어쩔 줄 모르는 복잡한 심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바로 이 영화, <질투는 나의 힘>으로 그는 청춘이라는 미묘한 이름을 단박에 정의해 버린다. 박해일과 함께 영화 속 인물들의 청춘이 무르익어 간다.
이 영화에서 배종옥 배우는 1인 2역을 맡고 있다. 하나는 포토그래퍼인 성연, 하나는 원상의 전 애인이다. 말하자면 원상과 윤식은 같은 얼굴의 애인과 두 번이나 삼각관계에 빠진 것이다. 윤식은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편집장으로 살고 있고, 그에 대한 보상 심리로 불륜을 저지르고 다닌다. 거기까지는 기분이 나쁘지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원상은 조금 다르다. 원상은 윤식에게 애인을 빼앗겼고 그로 인해 큰 좌절을 겪은 인물이다. 그런데 제 애인을 뺏은 윤식을 향한 호기심으로 그가 일하는 잡지사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게다가 두 번째 삼각관계에서는 분명히 승산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선택으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린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애인일까, 아니면 윤식일까.
오이디푸스의 아버지 라이오스는 어느 날 한 예언을 듣게 된다. "너는 네 아들로부터 살해당하고 그 아들은 어미와 잠자리를 가지게 될 것이다." 원래는 더 폭력적이거나 차별적인 대사였던 걸로 기억하지만,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라이오스는 불안감에 휩싸여 아들을 버리기로 한다. 그러나 용맹하게 자란 아들은 제 아비가 누군지도 모른 채, 길을 가다 벌어진 싸움에서 남자 한 명을 죽이고 한 여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신탁이 사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소경이 되기로 한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소포클래스의 비극이자 훗날 프로이트의 ‘거세 불안’ 이론의 큰 갈래가 된다. 진화심리학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나 이 영화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준 것만은 분명하다. 원상에게 윤식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다. 그가 살고 있는 하숙집은 하숙집 딸과 그의 정신 나간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점점 닮아가는 남동생이 사는 ‘남성성 부재’의 공간이다. 필자는 여기서 성별에 따른 성질의 실재에 대해 논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남성성과 여성성은 변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신체적 특질과 전형성을 띠는 사회적 성질일 뿐, ‘무조건 남자의 것’ 혹은 ‘무조건 여자의 것’이라고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점점 밝혀지고 있고 나는 그것이 지니는 의의가 더 크다고 믿는다. (좀 더 추가적인 이야기는 아래 부가 설명 1을 참고하길 바란다) 그렇다면 여기서 남성성의 부재가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원상과 오이디푸스가 남성성의 부재를 강하게 인식하고 있는 그 ‘상태’로부터 시작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남성성을 잃어버린 상황이 아니라, 그들이 그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심리를 가지게 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 불안을 견디지 못한 채 우발적으로 한 남자를 죽이게 된다.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의 눈을 찌른 것은, 진실을 외면하려는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한편 그것은 눈 앞의 세상을 외면하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의 심리적 불안이 자연발생적인 것이었다면 그는 눈을 찌르는 대신 죽음을 택했을 것이다. 마음에만 불안이 존재한다면 당장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지 않겠는가. 그가 세상을 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은, 세상이 그를 향해 남성성을 강요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원상의 경우에는 결말이 판이하게 다르다. 장인의 장례로 상중에 있는 윤식을 도우려 원상은 삼일 밤을 그와 함께 보낸다. 그리고 그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성성의 부재를 겪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로 인해 원상은 깨닫는다. 그의 여자를 빼앗아 취하려 했던 남성성은 사실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원상은 윤식의 집에 들어와 살기로 결심한다. 그 모든 과정을 윤식의 딸이 관음 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필자는 심리학을 전공하거나 깊이 공부한 적이 없으므로, 내가 설파한 모든 주장은 재미로 들어주면 좋겠다. 그렇지만 꼭 전공자만 말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알음알음 배웠어도 나름의 의견이 있다면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주어져 있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어떤 유명한 신화를 차용해서도, 어떤 유우명한 진화 심리학 이론이 적용되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이론을 한 번 비틀어 아주 다른 결말을 내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이야기를 다른 시선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원상은 남성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건 성질이라는 것이 자연발생의 결과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역시 이곳 여기, 사회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인식한 후 그는 먼 조상처럼 간접적인 방법을 써서 그것을 탈피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그들에게 어떤 색다른 배신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작가가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관음 하는 한 여자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지키려는 남성성의 견고한 탑을 고묘히 관찰할 수 있는 시점을 획득한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우정은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싸구려 유리와 같다. 그들만이 그것을 모른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한 편의 우화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견고하고 또 흔한 현실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아닐까? 완벽한 논리가 아니더라도, 멋진 이야기로 설득하고 공감을 얻는 것. 덕분에 우리는 술자리에서 영화 얘기도 하고, 오이디푸스 얘기도 하고, 여자와 남자 얘기도 할 수 있게 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이 영화를 여자 감독님이 작업하셨다고 해서 처음에는 조금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을 보고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차, 한 번 더 돌이켜 보고 또 글로 쓰고 나니 그제야 놓쳤던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명의 시를 곰곰이 씹어 보자. 박찬옥 감독이 남겨둔 재밌는 흔적들을 또 찾을지도 모르니.
부가 설명 1.
일례로 성별 간의 가장 큰 차이라고 일컬어지는 여성과 남성의 성기를 보자. 겉보기에는 두 기관 간의 차이가 아주 분명한 것으로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태아 초기에는 두 기관이 거의 같은 모양을 띠다가, 7~8주 뒤 성 염색체의 작용에 의해 변화하기 때문이다. 이 발견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우리가 아는 것만이 진리 혹은 과학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과학은 발견을 거듭할수록 기존의 과학을 배반하는 행태를 보인다. 두 번째로 자연적 현상보다도 그것이 현대사회에 끼치는 영향과 그로 인해 굳어진 편견이 우리를 훨씬 더 많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은 더 이상 자연발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우리는 자연발생적인 가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지도 않는다. 그랬다면 내가 이런 글을 써대거나 영화를 찍고 싶어 하는 대신 아이를 낳고 싶어 했을 거다. 아이를 낳고 자손을 번식하는 것만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욕구였을 테니까. 어느 날 개미들이 자손 번식을 멈추고, 일을 멈춘다면 우리는 그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개미의 사정을 모르는 우리는 그것이 자연발생적이라고 믿고 연구할 뿐 부자연스럽다거나, 개미들이 단체로 정신병에 걸렸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심지어 개미들 전체가 정신병에 걸렸더라도, 100%가 정신병에 걸렸다면 안 걸린 개미가 비정상이게 되지 않겠는가? 일정 수준을 넘어가는 순간 사회 문화 현상은 더 이상 자연발생과 거리가 먼 인위적인 어떤 것이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