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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Aug 04. 2020

다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데

책 <나를 보내지 마>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갑작스러운 공백에 저를 잊지는 않으셨는지 걱정이 되지만... 사실 저를 기억하는 분이 많지 않다는 사실에 작은 위안을 얻으며 다시 한 주에 한 번 연재를 재개하고자 합니다. 이 브런치는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 모든 문화에 대한 주관적인 시각 던지기를 기반이자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내 이름은 캐시 H. 서른한 살이고 11년 이상 간병사 일을 해 왔다. 11년이라면 꽤 긴 세월처럼 들릴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내게 올해 말까지 8개월을 더 일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되면 내 경력은 거의 12년에 이르게 된다. 내가 간병사로서의 경력을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한 것이 내가 그 일을 환상적으로 잘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아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사실은 아주 훌륭한 간병사인데도 일을 시작한 지 겨우 2~3년 만에 그만두라는 말을 듣는 사람도 있고, 정말이지 공간 낭비일 뿐인 형편없는 간병사인데도 14년 동안이나 이 일을 계속해 온 사람도 있다.


미리 겪어둔 미래


 '미래를 추억한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인간이란 얼마나 특별한지, 언어를 만들어 말을 하고 생각을 교환하고 기록할 뿐 아니라 없었던 일을 '상상' 하기도 한다. 상상이란 기본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일을 바탕으로 하지만, 사고 체계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한 인간이라는 필터를 거친다. 필터를 거쳐 나온 이야기는 정수기인 인간과 유기적인 관계를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라 할 지라도 익숙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여기 한 권의 SF소설이 있다. 이걸 읽고 나서 우리가 느끼게 될 감정은 무엇일까? 놀라운 상상력에 대한 감탄, 경외일 수도 있고, 자기비판, 문제의식에 대한 죄책감, 혹은 안도감일 수도 있다. 차근차근, 주인공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세 줄 요약

*이 밑으로는 스포일러를 포함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캐시와 토미, 루스는 헤일셤에서 나고 자란 오랜 친구이다. 그들은 장기 기증을 위해 만들어진 복제인간으로 기증자 혹은 간병인이 되어 평생을 살다 죽을 운명에 처해있다.


 설정부터 살펴보자. 장기 기증만을 위해 복제된 인간, 상당히 그럴듯하지 않은가? 이들은 각자 모체가 되는 인간을 가지고 있다. 인간과 물성이 같은 것은 물론이고, 인간과 같은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과 인간의 다른 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소설 내 현실에서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에게도 ‘영혼'이 있다며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게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지은 기숙학교가 바로 헤일셤이다. 헤일셤에서 나고 자란 캐시 및 학생들은 자신들의 쓸모에 대해 닳도록 배워 알고 있지만, 삶에 목적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목적만을 바라보며 살지는 않는다. 주인공 캐시는 '네버 렛 미 고(Never Let Me Go)'라는 노래의 슬픈 선율에 반해 이야기를 짓고 춤을 추곤 한다. 그의 친구 토미는 남몰래 독특한 그림을 그리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화자는 캐시로, 매우 주관적인 시각과 화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복제인간과 실제 인간의 차이, 혹은 복제인간의 몸이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세부적인 내용을 알 수는 없다. 대신에 친구들과 맺는 관계, 예술과 맺는 관계, 그리고 인간들과 맺는 관계를 통해 복제인간들의 사유 세계를 꼼꼼히 들여다볼 수 있다. 꽤나 긴 호흡으로 잔잔하게 쓰인 글은, 어쩌면 다소 모호하게 느껴질 만큼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다. 특히 화자인 캐시는 남다른 예민한 감각을 가진 인물이다. 그는 겨우 몇 마디의 말로 상대의 감정을 전부 꿰뚫는 양 행동하는 점에서 다소 오만하다고도 볼 수 있다. 이렇듯 1인칭으로 쓰인 소설에 대해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 화자인 복제인간에게 공감하고 그들을 인간으로 느낀다. 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과 인간의 삶을 명확히 분리한다.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든 결론적으로 독자들은 그들에게 연민을 느낄 것이다. 그들은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우리 아래의 종족으로서 가련한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연민, 정말 적절한 것일까?


왜 복제인간 이야기에 매료되는가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너무 좋아해 타투까지 한 나는 단연 복제인간 이야기에 목을 매는 타입이다.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은 아니고, 언제나 미래 세계에 존재하며, 묘한 회한을 느끼게 하는 이들의 정서. 특히 이런 장르가 '회한,' 즉 '지나간 과거를 뉘우치고 후회하는 정서'를 느끼게 한다는 의견은 단지 개인적인 감상으로 보기는 힘들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사운드트랙과 이 책에 등장하는 음악을 들어보자. '블레이드 러너'의 '러브 테마(Love Theme, Vangelis)'와 '나를 보내지 마'의 '네버 렛 미 고(Never Let Me Go, Judy Bridgewater)'는 직접 감상하는 것을 추천한다. 감미로운 색소폰과 잔잔한 드럼 사운드를 듣고도 주관적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냉혈한의 추억 속에는 어떤 기억이 있는지 해부해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이들은 왜 이런 음악을 고른 걸까? 그걸 생각하면 당신은 조금 불편해질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자면 단연 캐시가 '네버 렛 미 고'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일 것이다. 그 모습을 본 마담, 그들의 후원자이자 생물학적 인간인 그는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캐시는 그런 그를 발견하고 의아함을 느낀다. 자신들에게 언제나 냉정할 뿐 아니라 약간 경멸하는 모습을 보이는 마담이 감응하는 모습에 기분이 이상해진다. 나중에야 밝혀지지만 마담 역시 이들의 '인간적인 삶'을 위해 헤일셤을 짓는데 일조한 의식 있는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그 역시 복제인간들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 그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우월감으로부터 헤어 나오지 못한다. 캐시 일행은 계속해서 존재의 의미와 부조리의 굴레 안을 맴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자'를 찾기 위해 비슷해 보이는 인물을 추적하고 단서를 찾아 헤맨다. 그것을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어떠한가. 그들이 정말 모든 것을 알고 저항하길 바라는가? 혹은 좌절하고 절망에 빠지길 바라는가? 어느 쪽도 이기적인 우월감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할 것이다.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이런 가설을 세워봐도 될까? 이들이 존재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안도감을 획득하고 싶은 거라고. 그들처럼 개돼지 취급당하지 않아도 되고, 자율적인 선택이 보장되어 있는 자유로운 인간의 삶을 만끽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들은 이미 개개의 삶에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데도 와 닿지 않기 때문에 한 단계 아래의 것을 만들어 그 차이를 몸으로 느껴야 만족하는 족속이라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가? 영화 '기생충'을 볼 때 뜨거운 감자였던 '계급사회' 논란은 어떠한가? 보이지 않는 계급의 차이를 후벼 파 전면에 드러내고 예술적인 성취를 이루는 게, 과연 사회운동의 성격을 띠는가? 아니면 '가난 포르노'라는 이름으로 소비되고 소멸되는가. 차별에서의 해방을 주장하는 동시에 차별로의 회귀를 바라는 모순. 차별로부터 아름다움을 느끼고 타인의 괴로움을 음미하며 회한을 만끽하는 인간들. 그것이 읽는 내내 뼈아프게 느껴야 했던 고통의 실체였다. 책은 끝나고, 인물들의 인생이 어느 시점에서 마무리된다. 나는 그 마지막 시점에 대해 계속해서 생각했다. 과연 책이 그 이전에 끝났으면 어땠을까. 인물들이 모든 걸 알기 전에 끝났더라면. 혹은 특정 인물의 삶이 끝나기 전에 끝났더라면. 작가는 담담하고 정돈된 서술로 캐시의 사유를 묘사하고, 한 사유가 마무리되는 시점을 곧 한 장이 끝나는 시점으로 설정해 두었다. 그렇기 때문에 읽다 보면 이야기가 끝나도 끝난 것 같이 느껴지지 않고, 겨우 한 장이 끝났을 뿐인데 이야기가 전부 끝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작가는 화자의 삶에서 가장 잔잔한 순간을 마지막 순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이후 독자들의 삶 안에 이야기가 파고들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들의 남겨진 삶, 혹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못한 채 마무리된 삶. 둘 중 어느 쪽도 편하지가 않다. 이들과 이들을 억압하는 이들, 모두 내가 되었다가 나와 분리된다.


 이 글의 첫 소제목이 기억나는가? '미리 겪어둔 미래, ' 이쯤 되면 왜 우리가 SF 장르의 미래 세계에서 뜨뜻한 그리움을 겪었는지 이해가 된다. '돌아올 곳이 있기에 떠나는 인간들.' 아무래도 인간들이 그저 존재에 감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안일함에 대한 개인적인 반성과는 별개로, 책 속 인물들의 책 이후의 삶을 떠올려본다. 언젠가 기증자가 되어 생을 마감할지라도, 좋아하는 노래와 추억하는 사람들과 함께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복제인간 캐시. 다 태어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데 왜 우리는 여전히 존재 이유를 찾고 어떤 '확신'을 찾아야만 하는 걸까? 복제인간들이 자꾸만 이야기로 생산되고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이야기를 뛰어넘고 우리 삶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나와 다른 누구를 차별하고 우월해지고 싶은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 확장되어 가길 기원한다. 끝으로 이번에는 '애매한 결론' 대신, 책을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며 마무리한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에서 토미는 자신들에게 사실을 직시하게 해 주려다 해고된 루시 선생님의 판단이 옳았다고 말하면서, 아마도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 한마디를 내뱉는다. "이 모든 게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일이야." 슬프되 감상에 빠지지 않는 이 통찰이 토미에게서 나왔다는 사실은,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한 작가의 입장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 "이 모든 게 정말이지 수치스러운 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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