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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유주 Aug 19. 2020

절망은 도움이 된다

영화 <집의 시간들>

그때 그 집


 누가 나에게 가장 처음의 기억에 대해 물으면 항상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나는 카메라를 똑바로 보고 살짝 미소 짓고 있다. 머리는 동그랗고 크고 무거웠으며, 카메라를 쥔 사람을 향해 기어가고 있다. 이 기억은 사실 실제 '기억하는' 기억이 아니다. 부모님이 내 앨범 가장 첫 페이지에 꼽아둔 사진을 묘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사진을 떠올리면 나는 그때의 기분과 날씨까지 모조리 기억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프레임 속 풍경이 기억을 만들어 낸 것이다. 당신이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집은 어떠했는가? 여기 아주 오래된 아파트 단지 하나가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곳에서 짧게는 1~2년, 길게는 2~30년을 보낸 주민들의 추억을 담은 영화, <집의 시간들>이다.


세 줄 요약


 1979년에 준공되어 약 40년의 시간을 버텨 온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아파트. 이 작품은 재건축을 앞두고 이주를 해야 하는 주민들을 취재하고 기록한 영화이다.


 베란다 창을 통해 햇볕이 든다. 언제 샀는지 모를 슬리퍼, 열심히 닦아둔 화초, 훌라후프가 햇빛의 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여름의 소리가 들린다. 더울 땐 현관문을 열어두기도 한다. 현관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 긴 복도에는 각 세대가 내놓은 우산, 자전거, 대야 등이 차곡차곡 프레임을 이루고 있다. 바람이 불면 커다란 나무들이 소리를 낸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근처 학교에서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도 들려온다.

 X세대 끝자락부터 시작된 '아파트 키즈(Apartment Kids)'는 이전과는 현저히 다른 주거 환경에서 자라온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단일 건물의 아파트가 아닌 단지화가 진행되자 전문가들은 우려의 시선을 던졌다. 거리와의 접근성을 상대적으로 하락시키는 단지의 특성상 도시의 포용력을 약화한다는 부정적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획일화된 단지의 풍경이 경험하는 이로 하여금 장소성을 상실케 한다는 비판은 매우 중요했다. 아파트를 인간성의 소외로 인해 도시민과의 정서적 유대가 약하고 고향으로서 장소성이 부재한 공간으로 간주하는 것은 타당해 보인다. 1) 하지만 약 40년간의 세월을 견딘 둔촌주공아파트를 주제로 제작된 이 영화에는 우려와는 다른 지점이 존재한다. 영화의 첫 장면은, 아주 사적인 누군가의 거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복도, 놀이터, 공원으로 점차 확대되는 고요한 여정의 군데군데에는 주민들의 흔적이 묻어있다. 그들이 어떻게 공간을 경험했는지, 뭐가 좋았고 뭐가 불편했는지 이야기하는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적으로 깔려있다. 인물의 등장 없이 각 인물의 특징과 개인의 다양성을 이보다 더 잘 드러낼 수 있을까. 집이라는 공간, 공동 시설의 주민으로서의 삶.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것이 낯설지 않다. 실제로 영화에 출연하는 이들은 이 공간을 강한 유대감으로 대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고향으로의 장소성이 충분히 성립한다는 말이다.


절망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가 영화로서 의미를 지니는 데는 다루고 있는 현상이 이례적이라는  외에 특별한 이유가 하나  있다. 그것은  아파트 키즈에게 '비디오'라는 공통 주제가 하나  있다는 사실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로부터 시작하여 최근 예능 <놀면 뭐하니?> 이르기까지 복고 콘텐츠의 소비 주체는 단연 X세대이다. 그러나 이들에 머무르지 않고 Z세대까지 유행이 확대된 데는 8~90년대의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탁월하다는 현대의 특징적 배경이 깔려있다. 이들은 사각형 속의 세계에 매우 익숙하다. 직접 경험하지 않은 것을 프레임 안에서 간접 경험하며, 이를 통해 기억을 축적하고 추억하는 문화를 양산해 낸다.  번도 가본  없는 둔촌주공아파트로부터 낯설지 않은 향기를 맡을  있는 것은 이러한 문화 소비 패턴에 익숙하기 때문이라고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미디어가 매체 수준을 넘어 개인 크리에이티브 시대를 주도할 정도로 보편화되었지만, 등장 초기엔  역시 골칫거리 혹은 무시무시한 신종(新種) 불과했다. 물론 그들의 우려를 과장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결코 그것들에 적응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어쩌면 우리는 멸종하기 전까지는 모든 것에 절망하고  적응하고 발전하며 결국 추억해 내는 과정을 거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파트 키즈의 이례적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이며, 무서운 신종 앞에 절망하고 있지만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물론 절망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절망의 끝이 매번 낭떠러지는 아니라는 걸 안다. 이것은 비단 아파트와 비디오뿐 아니라 현재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혼란상황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시기상조의 지나친 긍정이라고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소망이라는 이름 아래   있다면 영광이겠다.


애매한 결론


 이후 당신에게 또 다른 10년이 주어질 것이다. 당신은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당신이 찍어둔 사진, 뉴스가 보도한 자료, 비디오, 어쩌면 영화가 당신의 지금을 대변할 것이다. 당신은 뚜렷이, 아니면 아주 흐릿하게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제야 프레임 안에 절망만이 담겨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추억의 이야기들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 <집의 시간들>의 장면 몇 개와 함께 마치기로 한다.



1) 임준하. "아파트 키즈의 아파트 단지에 대한 장소 애착과 기억." 국내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7.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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