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부일기>
당신은 어느 쪽을 고르겠는가? 누구나 자신과 꼭 맞는 동반자를 꿈꾸지만 그것을 찾아 헤매는 실패의 과정은 어쩐지 멸시당하기 일쑤이다. 특히 '인생의 동반자' 격으로 추앙되는 결혼 상대에 있어서는 그 기준이 훨씬 엄격해진다. 대략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의 기한을 주고 그 안에 영혼의 동반자를 찾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처럼 여기려 드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할 것 없이, 부부관계란 확실히 첫 형성부터가 독특한 양상을 보이는 관계임에 틀림없다. 인류가 발명한 가장 보편화되어 있는 장치이자 가장 인위적인 관계 공식. 최고의 상대를 찾은 것 같은 청년의 순수함으로 결혼을 시도하였지만 장렬히 실패하고, 엎지른 물을 수습하는 삼만 리의 과정을 통해 비로소 서로를 받아들이게 되는 기묘한 굴레. 그래서 당신은 전자를 택하였는가, 후자를 택하였는가?
오랜 친구인 두 부부, 잭과 샐리 그리고 게이브와 주디는 결혼 이십여 년 만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잭과 샐리의 별거를 계기로, 게이브와 주디의 관계마저 흔들리게 되는 것. 위기의 두 부부는 과연 관계를 존속할 수 있을까?
여기 두 부부가 있다. 넷은 오랜 친구이자 자주 모임을 갖는 사이다. 그중 한 부부는 저녁식사 자리에 채 가기도 전에 폭탄선언을 한다. 조만간 부부 노릇을 그만두겠다는 것. 그 말을 들은 다른 부부, 그중 아내인 주디는 큰 충격에 싸여 저녁식사에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폭탄선언을 한 잭과 샐리는 당황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보라고 한다. 아무런 슬픔도 노여움도 없는 평온한 그들의 얼굴이 보인다. '합의'를 한 것이다. 섹스리스 부부로서의 삶과 지루함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게이브와 주디는 큰 반응을 보인 것에 사과하고 그들의 말을 듣기 시작한다. 심정적으로 이해는 안 되지만 그들을 응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이 잔잔한 폭풍은 게이브와 주디로 하여금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결론은 어떻게 되냐고? 게이브와 주디는 이혼한다. 잭과 샐리는, 다시 만난다.
이 독특하고 유치한 치정극은 1992년작이다. 작가 특유의 빠른 대사처리와 장면 전환이 주요한 특징이고, 인물 내레이션이 극의 흐름을 이어주는 전형적인 우디 앨런 영화이다. 형식적으로 눈여겨볼 점은 우디 앨런답게 긴 테이크를 사용했다는 점과, 인물들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인터뷰 형식으로 털어놓는다는 점이다. 작가의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지만, 영화가 보기 걸리는 부분 없이 자연스러운 것은 형식적으로 긴장감을 완화하는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관객은 이 영화의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주위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제 입으로 토해내기 때문이다. 그들이 몰두하고 있는 생각들, 이를테면 샐리가 잭을 향한 증오의 감정을 키워가는 계기라던지, 주디가 격렬한 변화로의 충동을 이용해 새 애인 마이클에게로 떠나게 되는 과정 등을 그들의 입을 통해 상세하게 들을 수 있다. 때로 그들의 말은 하찮은 변명이나 핑계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 설득되고 나면, 영화를 본 이후의 우리는 더 이상 그전과 같은 우리가 아니게 된다. 마치 친구 부부의 이별을 겪은 뒤 주디처럼 말이다.
영화는 어느 지점에서 끝이 난다. 잭과 샐리는 다시 만나기로 하고, 주디는 새 애인 마이클을 만나며, 게이브는 홀로 남겨진다. 하지만 이 지점이 이들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는 한 지점에서 연구를 중단할 뿐, 남겨진 그들은 여전히 얼마나 가야 끝인 줄 모르고 계속 걸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마지막 시점에서 잭과 샐리는 서로가 운명의 상대임을 재차 확인한 것 같다. 주디와 게이브의 결별 역시 새 삶을 위해 필요한 도약 정도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특정 지점이 주는 환상일 뿐 실재가 아니다. 결혼이 인생의 종착점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결혼이 인생의 종착점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고, 새로운 시도를 하려는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들 역시 말미에 이르러서는 안정감으로의 회귀, '종착점 환상'으로의 되돌아 간 사람들처럼 굴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태도는, 이 영화가 결혼이 종착점이라는 환상을 깨부수는데 2시간가량을 할애한 것과 상반된다. 우리는 모두 삼만 리가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지 못할 뿐이다.
우리가 결혼을 통해 행복할 수 없는 건, 우리가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기 때문일까? "사랑은 오래 참음..."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참지 못하고 끝내 배신하고 신의를 저버리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라면, 반대로 우리의 고통은 우리를 억압하고 존재를 상실케 하는 딱딱하고 인위적인 관계 공식 때문일까? 부부라는 이름 아래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기 때문인 걸까? 영화는 주디와 샐리의 일탈이 불러일으킨 상반된 결과를 통해 "둘 다 틀렸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어쩌면 인생을 기차에 비유하고, 관계를 환승역과 종착역에 비유하며, 결국 언젠가는 Happily ever after,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에 집착케 하는 그 모든 환상들이 가장 틀린 것일 수도 있다.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기차의 종착역은 기차의 영원한 안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종착역은 곧 또 다른 여정을 위한 시발점이다. 네 인물의 인생 중 작은 부분을 잘라내어 연구하는 이 영화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니 모두들 인정해라. 인생의 끝이나 완성 같은 건 모두 환상이라는 걸. 당신들은 영원히 과거와 미래의 중간인 현재, middle, 중간에 위치하며 오도 가도 못하고 불행할 운명이라는 걸." 왜 이렇게 비관적으로 말하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게 나으니까요."
생각해보면 글을 비관주의로 마무리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이번 글은 왠지 그렇게 마무리하고 싶었다. 영화의 의견에 설득당했기 때문이다. '어찌어찌하다 보면 결국 행복할 거예요'라고 말하는 건 지금껏 피력한 의견을 부정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고, 일면 무책임하게 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를 뒤덮고 있는 불행과 고통의 중간 상태를 이제 그만 인정해야 한다. 다행히 하나의 좋은 점을 발견했다. 새로운 선택지를 고르면, 새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은가. 오늘의 비관이, 서글픈 인정이, 미래의 오늘을 향한 도약이 된다면 바랄 게 없겠다. 그러므로 이 글은 끝내 비관주의로 마무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