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원령공주>
요즘은 '이번 연도는 버리고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자연이 이렇게 인간에게 무심한 적이 있었던가? 세상은 어지럽고 인간이 만든 세계는 흘러만 간다. 그러나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매주 화요일은 다가오고, 글은 쓰여야만 한다. 책상 앞에 앉아 글로 채워져야 하는 빈 화면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우리가 이제껏 '가치 있게' 살기 위해 해왔던 일들은 과연 의미가 있는 걸까? 자연이 인간을 무력화시키려고 마음먹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왜 우리는 우리의 근본을 잊고 인간 세계에서나 통용되는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고군분투 해왔던 걸까? 진정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고, 어떤 것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이런 시기에 원령공주를 다시 보기로 마음먹은 건 잘한 일이었다. 이 영화의 감독처럼 선구안을 가진 자들의 좋은 점이 있다. 그들은 절대로 쉬이 굴복하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행복 회로를 돌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패배주의와 낙관주의, 그 중간에 있다.
에미시족 마을의 '아시타카'는 재앙 신으로부터 마을을 지키려다 오른팔에 저주를 받는다. 저주를 받은 자는 필히 떠나야 하는 법, 모험 길에 오른 아시타카는 재앙 신이 나타난 원인을 쫓던 중 늑대의 아이, '원령공주'를 만난다.
원령공주는 1997년에 개봉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이다. 한국 개봉은 2003년이며, 개봉 당시부터 이제까지 수작으로 평가되는 애니메이션 중 하나이다. 지브리의 감각적이고도 뚜렷한 작화로 애니메이션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은 물론, 스토리텔링 역시 재평가를 받아야 할 정도로 선구안적이다. 흔히 이 영화의 겉모습만 보고 '자연의 입장을 대변하는' 영화로 평가절하하기 쉬우나, 그렇게 해버리는 건 적절하지 않다. 이 영화의 주인공 격으로 등장하는 인물 '아시타카'는 저주를 받은 인간이다. 재앙 신과의 결투 이후 파괴적인 힘을 내뿜는 오른팔을 갖게 된 그는, 모든 사건을 용맹하게 해결하는 영웅의 역할을 도맡고 있다. 그렇다면 제목이자 가장 핵심 인물로 보이는 '원령공주'의 역할은 무엇일까? 그는 자연도 인간도 아닌 애매한 존재이다. 그는 인간이지만 인간에게 버려졌고, 늑대가 아니지만 늑대에게 키워졌다. 그에게 첫눈에 반한 아시타카는, 그가 더 이상 늑대에게 키워져서는 안 된다고 믿으며 그를 빼내려고 노력한다. 원령공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란에 빠진다. 그는 자신을 늑대이자 자연의 대변인으로 생각했고, 그것을 함부로 대하는 인간들을 응징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자연과 인간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원령공주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해야 할까? 이 가정부터 틀렸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원령공주가 인간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아시타카의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인간이 만든 인공의 세계에서 인간은 가장 편하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중간이 있다면 어떨까? 이제껏 원령공주가 늑대와 잘 살아왔던 것처럼 말이다. 가장 문제적인 건, '인간은 자연과 다르다' 혹은 '자연은 인간과 다르다'는 발상이다. 재앙 신이 된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 무리는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는 것에 혐오감을 느낀다. 인간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자연을 오랜 숙적으로 여긴다. 이제는 너무나 보편화된 이 사소한 발상으로부터 이들의 전쟁이 시작된다. 인간은 급기야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사슴 신의 목을 베기에 이른다. 이러한 장면은 인간인 관객들마저 인간을 혐오스럽고 추악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런데 막바지에 이르면 영화는 생각지도 못한 방향점을 제시한다. 아시타카와 원령공주 그리고 인간과 동물들이 힘을 합쳐 사슴 신의 머리를 돌려주지만 사슴 신이 결국 죽고 만다. 하지만 닿기만 해도 죽음을 불러오던 그의 몸이 사방에 흩어지자 남은 자리에는 새 생명들이 활짝 피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연이 인간을 용서한 것일까? 다시 한번 기회를 주는 걸까? 신은 대답하지 않은 채 생명과 죽음으로 우리 곁에 말없이 머무는 존재가 된다. 사실 그의 존재감은, 그가 형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는 언제나 은밀한 방법으로 모든 생명들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인간 역시 그 앞에서 한낱 생명일 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원령공주가 동물들과 숲에 살던, 인간의 도시에 살던 그게 자연 앞에 그리 중요한가? 인간이 언제 자연이 아닌 적 있었던가. 오만하게도 우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잊은 채, 자연을 객체화하여 두려워하거나 사용하거나 멸시해왔다. 하지만 우리가 자연이 아니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이란 말인가? 외계에서 떨어진 낯선 종족인가? 아니, 애초에 외계인이라도 그 역시 자연이지 않은가? 인간이, 언제 자연이 아닌 적 있었던가.
인간으로 사는 것은 무엇인가? 자연스럽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본능과 욕구를 구별하지 못하고, 진리와 체험을 구별하지 못하며, 삶과 죽음의 신비로운 규칙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바이러스로 안팎이 시끄러운 지금의 상황을 생각해보자. 우리가 과연 자연과 싸우고 있는가? 질병이 우리를 죽이고, 우리가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날씨가 우리의 발을 묶고, 지구는 우리 때문에 변화하고 있는가? 이 모든 수식은 사실 잘못됐다. 누가 누구를 악의적으로 괴롭히고 혼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연을 악의적으로 착취한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그 자체로 자연의 일부로서 존재해야 한다. 거리감이 생기는 순간,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고 여기는 순간, 자연은 낯선 것이 되어 버린다. 그에 대한 악의와 복수심이 생긴다. 그는 그저 우리의 일부이고 우리는 그의 일부일 뿐이다. 한쪽 발이 아프면 온 몸이 아픈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제목에 '무력하다'는 말은 정정해주어야겠다. 자연 앞에 한없이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은 패배주의를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는 무력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법을 강구하여 생명력을 지속할 뿐이다. 또한 자연 역시 우리에게 무심하지 않다. 다만 생명과 죽음으로 은밀하게 존재할 뿐이다. 자연을 고쳐 쓰는 게 아니라 서로 고통받지 않는 법을 찾는 것. 그리하여 서로 자연스러워지는 것.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이제 이 둘을 분리하는 짓은 그만 두자. 화해를 하고, 다시 하나가 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