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겨울은 유난히 길었다.
겨울이 왔다. 병실 창밖으로 보이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올겨울 바람이 유독 살을 에도록 춥다고 말해주었다. 병문안 오는 사람들은 죄다 코와 얼굴이 빨갛게 언 채로 발을 동동거리며 들어왔다. 사람들의 겉옷에 매달려온 바람 냄새를 맡으며, 나도 하루빨리 두꺼운 점퍼를 입고 밖에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성탄제 이후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 아직 조금 절뚝거리긴 했지만 곧 목발 없이도 병원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내가 입원한 곳은 가톨릭 성모병원이었다. 그래서 병실에 누워 있는 게 질릴 때쯤이면 병원 5층에 있는 성당에 갔다. 거기엔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아서 조용했다. 성당 안에 앉아 있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졌다.
고요한 백색 소음과 어두운 조명이 밝혀둔 십자가를 느끼며, 이곳에 홀로 남겨진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새롭게 떠오른 교리 아이디어나, 여름 캠프에서 할 게임 같은 것들을 메모장에 열심히 적었다. 퇴원 후 돌아갈 주일학교를 생각하며 내년을 계획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쉼에 대해 생각했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쉼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항상 몸을 불사르며 뛰어들었던 내게, 이번 사고는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내년엔 일상생활이나 성당에서나 때때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메모에 적힌 것들을 영영 쓸 수 없게 되었다.
겨울이 계속되던 중, 세상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하고 있었다. 고요한 병실에 틀어진 TV 뉴스에서는 전염병에 대한 소식이 이어졌다. 면회가 제한되고, 환자들은 하나둘 마스크를 쓰기 시작했다. 코로나. 그것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엉켜버렸다.
퇴원 후 처음 돌아왔을 땐 마스크만 잘 쓰면 되었다. 그런데 기간이 길어지고 5인 이상 모임 금지와 같은 규정들이 생기면서 점점 주일학교를 운영하기 힘들어졌다. 언젠가부터 잠정적으로 미사를 중단한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모두가 받아들였다. 그 해는 결국 뿔뿔이 흩어져, 가끔 오며 가며 생존 신고만 하게 되었다. 1년이 지나도 감염병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을 보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그래도 코로나만 끝나면 다시 볼 수 있으니까. 코로나만 끝나면.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런 행사도 하지 못한 채, 서로 제대로 만나지도 못한 채 2020년이 흘러갔고, 그대로 2021년이 되었다.
"주일학교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너무 충격적인 말을 들으면 오히려 담담해진다. 그날이 꼭 그랬다.
새로 명동에 발령받은 신부님은 이전 성당에서 주일학교를 만들고 막 여기에 오신 참이었다. 그런 열정을 가진 분이, 이곳에 오자마자 처음 보는 선생님들에게 가슴에 찬 물을 끼얹었다. 우리는 모두 그것이 신부님의 탓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날 처음 뵌 신부님의 눈에는 미안함이 가득했다. 안 돼요, 싫어요.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신부님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진 상태였고,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공기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방금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을 곱씹고 있는데, 정적을 깨고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한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그 선생님은 나만큼이나 주일학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큰 상심을 입었을 터였다.
"그럼 빨리 공지부터 해야겠네요."
그 어떤 원망도, 반박도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저 봉사하기 위해 여기에 온 사람들이다. 무슨 이유에서든 주일학교를 위해 몸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진 임무는 문을 잘 닫는 거였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없어진다. 그토록 돌아오고 싶었던 내 집이. 너무나도 사랑했던 주일학교가. 사라진다. 나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집에 가는 내내 칼바람이 볼을 스쳤다. 텅 빈 마음에 혹여 바람이 들면 쓰러질까 봐, 나는 옷깃을 단단히 여몄다.
2021년 2월, 내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 그 후로 4년이 지나도록 나는 싹을 틔우지 못했다.
마지막 미사 이후 4년째. 나는 냉담자로 살았다.
탓할 곳이 없어 하늘에 계신 분을 탓했다. 내가 사랑하는 주일학교를 없앴으니, 당신도 사랑하는 나를 잃어봐라. 그런 치기 어린 반항을 품고 오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명동에 발길을 끊었다.
어느새 남들과 똑같이 직장에 다니고, 주말엔 성당에 가지 않는 게 익숙해졌다. 주일학교의 기억은 떠올릴수록 괴로워 깊은 곳에 꼭 숨겨두었다. 그럼에도 문득 마지막 미사가 생각나는 날이면, 혼자 술을 마시며 고개를 떨구었다. 친구들과 놀다가도 주일학교 얘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났다. 그날의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못했다. 조금만 들추어도 유리 날에 베인 것처럼 따끔거렸다.
언젠가 돌아갈 생각으로 시작한 냉담이다. 믿음을 잃은 게 아니라 단순히 반항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오랫동안 성당에 가지 않다 보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믿음도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영영 냉담자로 살게 되는 것일까. 괜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여전히 내 계절은 겨울이었다. 나는 눈보라 한가운데에 서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함께 했던 동료 교사들은 어딘가에서 성가대나 전례단 같은 다른 봉사를 찾아서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함께 하자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다른 봉사자들이 본다면 정말 혀를 찰 노릇이었다.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도움이 필요한 곳에 몸을 내던진다. 하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주일학교가 아니라면 그 무엇도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게도 문득 성당에 가고 싶어서 무작정 동네 성당엘 갔다. 미사를 하고 보니 부활절을 한 주 앞두고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성가 노랫말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하필이면 아이들과 함께 불렀던 노래였다. 그 생각만 하면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옛 추억에 잠긴 채 미사를 마치고, 성당 밖으로 나오며 나도 모르게 생각했다.
'명동이 아니더라도, 여기에서 새로 시작해도 좋지 않을까?'
주일학교는 어디에나 있는데, 꼭 명동일 필요는 없지 않나. 그날부터 동네 성당의 주일학교를 마구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주일학교뿐 아니라 다른 봉사도 눈여겨 보고 있었다. 마침내 다음 부활 미사가 끝나면 가장 처음 내게 말을 거는 단체에 봉사자로 들어가야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됐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부활 미사가 끝난 뒤, 당연히 아무도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봉사는 자원하는 것이지 누군가 권유해서 하는 게 아니다. 아무래도 조금 더 성당에 다니면서 들어갈 만한 곳을 탐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냉담을 풀고 다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쌤, 통화 괜찮아요?"
"네네, 선생님. 무슨 일이세요?"
"명동에 주일학교가 다시 생긴대요."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부활절이 지나고 한 달이 채 되기도 전, 함께 봉사했던 선생님에게 주일학교가 부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사실 전부터 소식을 듣고는 있었다. 주일학교가 생긴다더라, 새로 교사를 구한다더라. 하지만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예와 같은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아이들을 예전처럼 잘 알지 못한다. 오랜 냉담으로 믿음도 부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괜히 뛰었다. 왜 나한테 그 소식을 전하려고 전화했을까. 어쩌면. 어쩌면.... 그다음 말을 듣고, 나는 입을 틀어막은 채 뜨거운 눈물만 뚝뚝 흘렸다. 선생님의 그 말은 오래도록 내 가슴을 데워주었다.
"돌아와야지. 이제."
2025년의 5월, 드디어 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