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수아 Nov 29. 2021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영화

<스틸 라이프><쇼생크 탈출><아비정전><머니볼>

"그가 떠난 이 텅 빈 화면은 보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안긴다. 나는 산밍이 아내와 재회한 순간부터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내내 부끄러움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걸 가르쳐주는 영화는 정말 흔치 않다.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에 대한 남다은 평론가의 말이다. 그녀는 그 영화가 "부끄러움을 가르쳐준 영화"라고 말한다. 영화는 사람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고 보여주지만 영화가 가르치는 부끄러움은 특별하다.



<쇼생크 탈출>은 좋은 영화이다. 물론 모건 프리먼의 따뜻한 나레이션과 옥상에서 맥주를 마시는 장면의 아름다움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사람을 살도록 하기에 좋은 영화이다. 나는 오래 전부터 좋은 것이란 사람을 살아있게끔 하고 나쁜 것이란 사람을 죽게 만든다고 믿어왔다. 그건 음악이나 사랑이나 친구나 일이나 모두 매한가지로 적용되는 기준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Ou_1kHWNC8

조성모의 <가시나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이 아픈 노래이다. 가사처럼, 무언가를 꽉 쥐고 있어서 누군가를 사랑하지 못하는 건 큰 비극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노래를 듣고 울지만 죽지 않는다. 되려 그 슬픔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살아갈 마음을 얻는 것이다. <가시나무>는 내 기준에 따르자면 참 좋은 음악이고, 말하자면 어떤 우울한 것들은 비극적이지만 염세적이지는 않다.



뻔하고 아름답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그래서 좋다. 희망이 소재여서가 아니라, 이 영화의 관객이 희망을 품게 된다는 점에서 좋다. 어떤 영화는 2시간 30분 내내 희망을 이야기하지만 관객은 희망을 얻지 못하기도 한다. <쇼생크 탈출>은 관객이 삶의 어두운 일면을 인정하면서도, 끝내는 희망을 품게 만드니까 좋은 영화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영화는 남다은 평론가 말대로 흔치 않다. 누군가를 부끄럽게 함으로써 다시 살아가도록 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용서, 로맨스, 희망이나 위로는 사람을 살아있게 만들기 쉬운 감정이다. 우리가 좋다고 느끼는 많은 영화들은 우리에게 그런 걸 느끼게 하고, 우리를 계속 살도록 만든다.




글 초반에 언급했던, <스틸 라이프>에 대한 남다은 평론가의 감상을 알고 영화를 감상했다. 영화는 재밌었고, 나는 남다은 평론가를 무척 좋아한다. 그럼에도, 이걸 보고 과연 내가 부끄러워하나 두고 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건 의미있는 나만의 감상을 하고자하는 마음에서 나온 오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부끄럽지 않았다. 중국 노동자들의 생활을 옆모습을 소묘하듯이 그려내는 저 영화는 어딘가 처절했고 어디 한 군데를 성가시게 했다. 그러나 나는 내내 부끄럽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나왔고, 나는 무척 부끄러웠다. 부끄럽지 않으려고 애썼던 노력이 민망하게 부끄러웠다. 그 감정 없는 장면을 다시 떠올리며 지금도 나는 부끄럽다.



생각해보면 그런 영화들이 있다. 마음의 불편한 어디 한 구석을 쿡 찌르는 영화. 나를 혼내지도 비웃지도 학대하지 않지만 내 안의 무언가를 골라내어 눈앞에 보여주는 영화가 있다. "이거 봐, 너 뭔가 하나 놓치고 있잖아."라는 삶에 대한 낯 부끄러운 언질이다.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좋은 영화는 내가 얼마나 삶이라는 걸 멸시하며 살아왔는지 알게해준다.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삶을 경멸하는 인간의 모순을 내게 폭로한다. 정말로, 살아갈 작정이라면 제대로 살아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실해야 하고, 얼굴 앞에 놓인 모든 것들에 몰입해야 한다. 그 폭로를 지켜본 사람은 나뿐이지만 나는 내 삶 앞에서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나는 <아비정전>을 보고 부끄러웠다. 나는 영화 주인공처럼 미남도 못되고 바람둥이도 아니다. 다만 내가 사랑받고자 하는 스스로의 욕망에 얼마나 솔직하지 못했는지, 그 유치한 욕망을 숨기고자 한 어른 흉내가 얼마나 우스운지를 알게 되어 부끄러웠다. 나는 영화를 재개봉관에서 보고 나와서, 친구에게 왜 이런 영화가 명작인지 모르겠다고, 다른 왕가위 영화에 한참 못 미친다고 어쩐지 화를 섞어서 이야기했다. 친구는 자긴 좋더라는 밍숭맹숭한 답을 했다. 그 맥빠지는 답에 나는 어쩐지 차분해져서는 집에 돌아가 죽 생각을 했다. 다음날 친구에게, 사실은 내 삶에서 어딘가 부끄러운 구석때문에 영화를 미워했노라고 말했다. 친구는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너한테라면 그 영화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또 싱거운 대답을 했다. 내 부끄러운 삶을 내내 지켜보면서도 그동안 첨언하지 않았던 그 친구에게 그때 참 고마웠다.




같은 친구는 <머니볼>이 그저 그렇다고 이야기했다. 재밌긴 하지만 큰 감흥은 없단다. 그 친구는 한화 이글스의 오랜 팬이며, 온갖 야구통계들을 줄줄 외우고 다닌다. 나는 야구를 두 이닝 이상 본 적 없는 야알못이고 말이다. 친구는 내게 <머니볼>같은 영화는 야구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더 좋아할 만한 영화라고 했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이런 경우에 영화는, 리얼리즘에 대한 마니아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셈이다.


머니볼은 가난한 메이저리그 팀 단장 '빌리 빈'의 이야기이다. 자신이 믿는 방법으로 외롭게 싸워가던 그는 영화의 끝에서 꽤 괜찮은 성과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룬 건 아니었다. 싸움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긴장한 얼굴로 빌리 빈은 차에 탄다.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차를 운전하는 그의 옆모습에 주름이 빼곡하다. 한 손으로 딸의 노래가 녹음된 CD를 플레이어에 넣고 틀고, 딸의 노래를 듣는 빌리 빈의 옆모습으로 영화가 끝난다.


Life is a maze. Love is a riddle.



온갖 것에 대한 집착과 긴장으로 범벅이 된 튼튼한 남자의 삶은 딸의 노래 앞에서 힘을 잃는다. 그 깊은 고민은 어린아이의 노래에 의미를 잃는다. 나는 전광판의 '2-1'에서 어느 것이 스트라이크이고 볼인지 모르지만, 저 독기 품은 고독한 남자의 이야기가 끝날 때면 무너져내린다. 그것도 매번 완전하게 무너져내린다.



정말로, 부끄러움을 가르쳐주는 좋은 영화는 흔치 않다. 그런 영화가 알려주는 부끄러움은 수치스럽지 않다. 그런 부끄러움은 고독한 부끄러움이고 개인적인 부끄러움이다. 그리고 다시 말하자면, 사람이 진정으로 삶을 살아나가도록 한다. 참 감사하게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