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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썸프로 Dec 21. 2019

겨우 반차를 냈던 어느 금요일 오후


겨우 반차를 냈던 어느 금요일 오후였습니다

요즘 직장에서 일이 너무 바빴습니다. 스마트하게 바짝 일을 끝내 두고 정퇴 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야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으로 야근하는 사람들은 일을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새로 옮긴 부서에서 생긴 일들은 정말이지 예측하지 못한 상황들이 많이 펼쳐졌습니다. 7시간 시차가 나는 유럽에서의 연락은 오후 4~5시가 돼서야 회신이 오고(물론 한국의 워킹 아워를 고지하긴 했습니다만, 우리의 성격 급하신 팀장님들은 실무자가 제때에 회신을 해주길 바라시고 저 또한 일이 들어오면 웬만히 미루지 못하는 성격입니다.) 2시간 시차밖에 안 나는 중국이나 베트남에서도 왜 그렇게 오후 4시가 다 돼서야 회신이 오는지 모르겠습니다. 베트남에서는 오후 10시에 개인전화를 한적도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전략부서로 바뀐 뒤로부터는 신규사업에 대한 계획서도 인볼브가 되어 매일 부서장님과 회의 후에 새로운 과제를 내어주시는 시간이 오후 4~5시입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 아침 그 과제를 모두 업데이트해서 다시 회의를 하는 시간이 오전 10시이니, 늦게까지 PPT를 보고 수정하는 작업을 합니다. CEO가 보시는 발표문서를 작업하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너덜너덜한 정신으로 늦게 서야 카톡을 확인하면 친한 동기 5명의 단톡 방에 쌓여있는 300~400개 메시지들이 남아 있습니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정독을 했습니다. 그게 내가 이 친구들에 대한 관심이고 애정이라 생각했으니 늦게 발견한 카톡에도 혼자 하나하나 답장을 쓴 적도 많았습니다. 그때도 회신 없는 메아리입니다. 퇴근과 동시에 거의 단톡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근이 일상이 되니 그마저도 사치였습니다. 타인과 놀고 수다를 떨 에너지도 남기지 못하는 회사가 원망스럽고 내 시간을 갖지 못하고 집에 가면 먹으면서 소파에 누워있기만 하는 자신을 발견한지도 2주일이 넘었습니다.


오늘 친한 회사 동기들 5명 중 3명끼리 회사 내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이 올라와있었습니다. “언제 사진을 찍었대…” 이 날은 겨우 낸 반차 휴가 여유를 통해 단톡 방 메시지를 읽다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말합니다. “지난주부터 계속 얘기했었잖아!”. 단톡 방에선 어느 순간부턴가 제때 확인하지 못한 사람이 잘못이라는 분위기가 암묵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듯했습니다.


일 년에 몇 번 날을 잡고 저녁을 함께하는 모임은 홍대 근처에서 합니다. 동기들은 보통 6시 정퇴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어진 일을 빨리 끝내 놓거나, 여유 부리는 일을 못합니다. 그저 일의 양이나 끝나는 시각을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원래 계획했던 일들이 무너지는 것은 일상입니다. 갑자기 부서장 회의가 잡히면 개인 실무를 볼 시간에 1~2시간 회의시간을 빼야 하고 회의가 끝나면 또 다른 새로운 업무들이 생겨나기 때문이고, 시도 때도 없이 자신이 편한 시간에 회신을 주는 상대 업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기는 말합니다. ‘본인도 언제 일이 끝날지 모르겠대’. 나를 제외하고 6시에 모여서 다들 나가는 것도 아쉬운 일인데 이렇게 말해버리니 할 말이 없습니다.


회사는 집과 거리가 상당히 있습니다. 서울의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며 통근시간이 3시간이니 워라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동기들은 어느 순간부터 홍대 일대로 만남 장소를 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좀 더 강남역이나 삼성역에 가깝게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 뒤로 의견도 내지 않았습니다. 홍대 일대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좋아하지 않습니다. 분위기가 아무리 좋다고 한들, 사람들이 많아 북적거리는 것 자체가 힐링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거니와 집에서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밤 11시에 출발해도 집에 도착하는 시간이 1시에 가까운데, 다음날이 너무 힘듭니다. 일 년에 몇 번 없는 동기 모임이니 동생들의 의견에 따릅니다.

언제부턴가 동기들이 매일 600개가 넘는 카톡으로 업무시간에 수다를 할 때, ‘어떻게 저렇게 많은 톡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함께 본인들이 하고 있는 말에 참여를 못하거나 질문을 던져도 언제 무슨 질문을 했는지 놓치는 일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매주 화요일에 점심으로 함께 합니다. 오전에 바쁘게 업무를 하다가 점심시간에 가까워 ‘점심 머먹기로해 써!!’라고 던졌는데, 앞에 100개가 넘는 카톡을 스킴하고 딱히 정해진 메뉴가 없는 줄 알았습니다. ‘바로 위에 있다 언니... 좀 읽어주라ㅠㅠ’라고 합니다. 다시 보니‘싸이 세트’라고 하는데 햄버거를 1년에 1번 먹을까 말까 한 나는 이게 뭔지 몰랐습니다. ‘아 언제 내가 안 먹는 햄버거를 시켰었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정부와 하는 사업, CEO 보고 문서 작성, 5개국 8개 업체들과의 계약이행에 대한 실무 마무리 등 새로운 일들이 펼쳐졌고 그런 일들이 나도 모르게 훅훅 들어왔습니다. 그게 미안해서 동생들이 하는 말에 웬만하면 동의했고 이 친구들과 함께 했었습니다. 그런데 동기(동생)들이 무심코 툭 던진 말 한마디, 그냥 넘겼던 말 한마디, 아무렇지 않은 척 쿨한 척 지나쳤던 동기들의 말 한마디들은 사실, 그때마다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었습니다. 친한 동기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일들에서도 마음이 다치기도 합니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습니다. 본부장님께서 갑자기 내신 휴가 덕분에 저도 갑자기 반차를 낼 수 있었고, 그런 행운의 날이었습니다. 그런데 단톡 방에서 이런 말들이 남겨졌고 이런 관계라면 그냥 내려두고 싶은 날이었습니다.



책 쓰기 강의

그런 날 저녁에 ‘책 쓰기’ 강의를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의 꿈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그 속에서 하나, 둘씩 무언가를 이루어갔던 이야기 말입니다. 나만 가지고 있는 그런 이야기를 펼치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는 약 8개월 동안 북 클럽 활동도 했습니다.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긴다는 것은 또 다른 자유이고 성취감이었습니다. 분야가 제각기 다른 사람들과 한 가지 주제를 두고 토론하면서 새로운 시각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8개월 동안 일주일에 1권의 책, 1개의 북리뷰를 작성하면서 책 읽기 습관을 들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8개월이 지나고 잡힌 5번의 해외출장, 띄엄띄엄 있던 해외출장을 모두 합치면 3주가량 되는데 출장 전후로 준비하고 보고해야 할 문서들이 엄청났습니다. 8시~8시 반 퇴근, 10시~10시 반에 집에 돌아오는 일이 많았는데 이것이 핑계라면 핑계였습니다. 책은 다시 멀어졌습니다.


오늘 들은 ‘책 쓰기’ 강의는 책 읽기가 결코 지식인만의 일의 아니라는, 꼭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는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메시지가 콕 와 닿았습니다. 이은대 작가님의 삶이 통째로 녹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강연의 진정성이 달랐습니다. 중간중간 울컥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데 25여 명이 있는 강의실에서 혼자 울 것만 같아 꾹 참았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강연장 뒷 좌석에서도 이미 눈물을 줄줄 흘리시는 분들이 계셨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타인의 눈치를 많이 보고 사는 것 같습니다. 강연 내용은 감동으로 울리기도 했다가 박장대소 웃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강연 중에 가장 기억에 남았던 메시지는 이겁니다. 쓰는 것이 어렵다면,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요.’부터 쓰고 시작하라는 겁니다. 매일 하루의 일을 일기로 남기는 나로서는 공감이 많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매일 한 단락이라도 남기자라는 것이 철칙이 되었는데, 어제 일을 남길 때면 잘 떠오르지 않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어제 내가 뭐했지’부터 생각하는데, 그걸 그대로 적어가며 연상 기억으로 술술 씁니다. ‘Today I was so busy’, ‘It was too tough day’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는 독서와 글쓰기는 ‘더 빨리, 더 높이 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멈추기 위함’이다. 시간이 없어진 뒤로부터는 독서 한 권을 해도 남겨야겠다는 목적의식이 강해졌고, 그에 따라 책 읽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졌던 찰나에 들은 이 메시지는 모든 것이 쉬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일을 수단과 목적으로 보기 시작할 때 우리의 정신은 피곤해지기 시작하며 시작할 엄두조차 못 냅니다.


세 번째는 모든 글은 ‘경험 + 느낌’을 서술한 것에 다름 아니다. 했던 일을 적고 느낌을 적는 것이 글쓰기의 전부라는 것입니다. ‘작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뭔가를 꾸역꾸역 쓰는 사람이다’는 정의가 글쓰기에 대한 부담감을 모두 걷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네 번째는 ‘안 해도 되니까 합니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왜 글쓰기를 하나요? “. “안 해도 되니까 합니다”. 글쓰기는 자유로운 일입니다. 살면서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일들이 거의 없습니다. ‘해야 되니까’하는 일들이 90% 이상을 차지합니다. 글쓰기는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가장 자유로운 입니다. 그래서 너무도 멋진 일입니다.

글쓰기 꿀팁을 들으러 갔다가 작가님의 인생으로부터 삶을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자신만의 시간에 꿈을 마주하고 한 발짝 다가가는 느낌과 강연의 진정성 덕분에 내면에 알게 모르게 남아있던 상처의 조각들도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강연을 다 듣고 나니, 이 날 늦은 점심을 함께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싱가포르 지인이 톡을 남겼습니다. “Are u at Ur class?”, “drinks after?”, “was just hoping to see more of u.” 사랑하는 남자 친구가 있다고 했는데 모양새가 별로입니다. 공허한 메시지들에 공허이 에너지를 뺏기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이은대 작가님이 말씀하셨던, ‘아무것도 아닌 일에 에너지를 쏟지 마라’라는 말을 실천할 때인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점심메뉴를 세상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지 마라’입니다. 그럴 시간에 글쓰기 1장이라도 하는 하면 좋은 것이지요. 강연을 듣고 난 뒤의 행복감이 충만한 마음을 유지하며, 남자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며 굿-나잇을 했습니다. 소중한 이와의 만남과 나눔이 더욱 진귀해집니다. 내 삶에 진짜만 남기고 싶습니다.


#이은대 작가님 책 내가 글을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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