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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y 18. 2017

29. 한국인에게 라면이란

너와 나의, 소울푸드(5) 라면

 라면을 싫어하는 한국인이 있을까? 체질 때문에 라면을 못 먹는 사람(밀가루 알레르기 라던지)은 있을지언정 라면을 싫어해서 안 먹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다. 라면을 즐겨 먹진 않더라도, 여름철 물놀이를 마치고 냇가에서 끓여먹는 라면 이라던지, 늦은 밤 배고픔에 못 이겨 끓여 먹는 라면을 생각해본다면, 아, 라면이 없는 삶이란 얼마나 퍽퍽한 것일까를 상상해볼 만하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라면을 즐겨먹지 않는다. 정말, 정말 배가 고프지 않은 이상 라면엔 손을 대지 않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라면은 건강에 좋지 않은 인스턴트식품이라는 무의식 중 거부반응 때문이다. 라면은 수많은 네거티브에 쌓여있다. 사실 평소에 내가 먹는 음식들도 결코 라면보단 영양가 있을 것 같진 않기에 라면이 들으면 꽤 억울할 만도 하다만, 라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건강하지 못하다는 게 객관적인 사실이다. 아무리 새로 출시되는 신제품 라면 이름 앞에 유기농, 저 칼로리 등 수식어를 붙이면 뭐하나. 라면은 라면이다. 손바닥 만한 작은 봉지 안에 상당한 칼로리, 나트륨 그리고 MSG의 집합체가 똘똘 뭉쳐 있는 것, 그것 말이다. 사실 계산을 안 해봐서 그렇지 라면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보다 훨씬 많은 칼로리와 나트륨 그리고 MSG를 벌써 섭취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 왠지 라면은 나쁜 식품의 대명사 같은 느낌이라, 되도록이면 먹으려 하지 않는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네요, 라면 씨. 세상에는 악역도 필요해요. 사실 내가 챙기고 싶은 건 건강이 아니라 라면이라도 안 먹어야 건강해질 거란 정신승리일 듯하다만.

 그리고 두 번째는, 그리 배고프지 않을 때 먹는 라면은 퍽 실망스럽기 때문이다. 라면의 맛은 사실 특별하지 않다. 내가 라면을 '맛있다'라고 느꼈던 경험을 생각해봐도 그 경험은 대개 라면 본질의 '맛'보다 '상황'에 훨씬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물놀이 후 끓여 먹는 라면이라던지, 늦은 밤 누나가 끓인 라면에서 건져 올린 뺏어 먹는 라면 한 입이라던지, 대학 MT에 삼삼오오 모여 다 같이 먹는 라면 이라던지, 만취한 다음날 먹는 얼큰한 숙취해소용 라면 같은 것 말이다. 사실 이미 배가 부르거나 특별히 고프지 않은 상황에서 라면의 맛은 그냥 라면 맛일 것이다. 맵고 짜고 얼큰한 그런 맛. 사실이 그러하니 평소에도 정말 먹을 것이 없거나 특별히 배고픈 상황이 아니라면 라면을 찾지 않게 된다. 이것이 내가 라면을 자주 먹지 않는 이유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가? 모든 음식은 배가 고플 때 먹어야 더 맛있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나, 라면은 조금 특별하다는 것을. 배가 고플 때 먹는 라면은, 특히 그 라면이 들어가는 위장이 한국인의 것이라면, 4성급 미슐랭 레스토랑도,  한 시간 줄 서서 먹어야 하는 맛집의 시그니처 메뉴에도 견줄만한 것이 되어버린다. 그야말로 엄청난 음식이 되어버린단 말이다.

 특히 오랜 여행 중의 라면은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여행 중인 국가의 주식이 매운 음식이 아니라면(아시아권이 아니라면) 더더욱이!

 내 여행에서의 라면 또한 그러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배낭에 구겨 넣은 라면을 도로 끄집어내며 '굳이 라면까지 챙길 필욘 없겠지'했던 나는 여행 중 라면이 고팠던 순간에 깊은 반성을 했더랬다. 굳이, 아니, 무리를 해서라도 챙겼어야 했던 것이 바로 라면이었던 것이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했을 때 나에게는 라면이 없었다. 현지에 가면 현지 음식을 먹자는 주의이긴 하나, 일교차가 심한 조금은 쌀쌀한 저녁 날씨 때문이었을까, 다른 문화권의 여행에 슬슬 지쳐서였을까, 뜨거운 국물이 미친 듯이 당기는 때가 왔다. 사실 일전에 여행 중인 지역이 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베니아 같은 국가이다 보니 뜨겁고 얼큰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기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유럽 및 발칸 지역은 (수입 식품이나 중국인 식료품점을 제외한다면)온 동네 상점을 뒤져봐도 매운 식재료 찾기가 하늘에 별따기다. 때문에 굴라쉬(헝가리식 비프스튜)가 있는 부다페스트에 희망을 품었건만 굴라쉬는 전혀 맵지도 얼큰하지도 않은 맛으로 나를 배신했다.

 빵, 고기, 면의 홍수 속, 이로 인한 모든 갈증은 라면 하나면 충분하단 걸 알기란 어렵지 않았다. 해결책이 곧 라면임을 알게 되니 머릿속에 미친 듯이 라면의 그 맵고 뜨겁고 얼큰한 빠알간 국물이 떠나가질 않았다. 거기에 한 점 얹어 먹는 김치 한 조각까지 있다면 지금 당장 여행을 그만둬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인 인가봐.

 맵고 얼큰한 한국 라면이 먹고 싶어진 나는 폭풍 검색으로 부다 페스트에 있는 한인 마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자마자 세체니 다리며 부다 페스트의 화려한 야경은 뒤로 한 채, 한인 마트 여행을 나서게 되었다.

 트람을 타고 버스를 타고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 위를 헤쳐 올라가 찾아간 한인 마트는 문이 닫혀 있었다. 엄청난 실망감과 분노에 휩싸이길 잠시, 자세히 보니 마트 앞엔 이사를 갔다는 안내 표지판이 있었다. 마지막 희망을 걸고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기어코 진짜 한인 마트를 찾아냈다. 여러분, 라면이 이렇게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슈퍼 같은 한인 마트에는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고 다 있었다. 너구리, 신라면, 짜파게티, 김치, 만두, 김, 쌀까지. 여기가 부다페스트인가 한국인가 싶을 정도로 화려하게 진열된 한국 식품의 모습에 입을 헤벌쭉 벌린 채 구경하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연예인을 봤어도 그렇게까지 흥분했으려나. 라면 8봉지를 구입한 나는(김치는 돈이 없어 못 샀다.) 양 손 가득 라면 봉지를 든 채 마트 앞에서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다른 여행객들이 세체니 다리며 국회의 야경 앞에서 기념사진 찍고 있을 때, 나는 라면이랑 사진 찍었습니다. 김치.

 그렇게 반나절에 걸친 한인 마트 여행을 마친 나는 땀에 쩔은 채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마친 뒤 라면을 끓였다. 샤워 후에 먹는 부다페스트 라면의 맛, 아아,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아니, 못 하겠다. 이 맛을 어찌 감히 문장으로 표현하리..! 무엇보다 확실한 건 오랜 갈증이 매운 국물과 시원하게 쓸어져 내려갔다는 것, 그것이었다.

 이와 같은 갈증이 비단 나뿐만은 아니니, 어쩌면 한국인 여행객에게 있어서 라면은 비상 상비약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라면을 먹고 타지에서의 잔병이 나았다는 여행기를 본 기억도 있다. 작가 태원준 씨나 이병률 씨의 에세이, 여행기 중에도 라면을 먹고 병이 나은 엄마나, 라면 하나로 온 몸의 기를 보충했다는 일화를 찾아볼 수가 있다. 라면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그야말로 자타공인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이처럼 라면은 한국인에게 있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소울푸드인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소울푸드란 대개 음식의 맛보단 상황이나 추억에 영향을 받지 않던가.

 나는 소울 푸드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힘들 때 위로가 되는 음식'

 내게 있어서 라면은 힘든 고시원 생활에서도, 낯선 타지의 생활에서도, 어릴 적 가난했던 시절에도 늘 가족같이, 친구같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음식이다. 어쩌면 여행에서 그처럼 라면을 고파했던 이유는 단순히 매운 국물을 원했기보다, 내 고향, 한국의 기억을 목구멍 깊숙이 스미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맛이라는 영역은 그 재료 본연의 가치나 음식을 만든 사람의 실력에 기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떤 이에겐 특별한 날 먹은 값비싼 최고급 스테이크가 별 의미 없는 맛으로 기억될 수 있는 반면, 어떤 이에겐 어릴 적 한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끓여 먹은 라면이 최고의 맛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난히 어렵고 힘든 시절을 함께하는 음식인 라면은 많은 한국인들의 가슴속에 그 어떤 음식보다 따뜻한 온도를 지닌 소울 푸드로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저렴하고, 만들기 쉽고, 맛있기까지 하니까.

 이렇게 적고 보니, 가끔은 '몸에 나쁜 음식' 라면을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음식일지도 모른다고 얘기해줘야 할 것만 같다. 나도 못하는 것을 지금 이 순간에도 라면은 해내고 있지 않은가. 가난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매콤하고도 뜨거운 위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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