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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May 26. 2017

30. 게으른 게 어때서

오키나와는 게을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지로 오키나와를 선택한 이유는 단순했다.

 '쉬고 싶어서'


 어느 이름 모를 낯선 지역에 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되어 작은 골목들을 둘러본다. 골목 귀퉁이 어딘가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에 발걸음을 좇다 보면 눈이 부시도록 맑은 에메랄드 빛 바다가 기다리고 있다. 볕에 달궈진 하이얀 모래를 밟는 느낌은 갓 구워진 식빵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잠시 눈을 감고 바다가 부르는 파도소리에도 귀 기울여본다.

 그렇게 찾아온 오후의 평화를 깨뜨리는 건 뱃가죽을 두드려대는 꾸르륵 소리. 고개를 돌리니 백사장 위 작고 허름한 낡은 카페 하나가 눈에 띈다. 가볍게 밀어 열어본 여닫이 문의 은은한 풍경 소리가 카페 안 가득 번진다. 인사 대신 가벼운 미소로 환영하는 주인아주머니를 지나쳐 제법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낡은 나무 의자 위에 앉아 주문한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차가운 커피 한 잔. 창 밖으론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에메랄드 바다와 푸른 하늘이 엽서처럼 펼쳐져 있다. 노트를 펼쳐 가벼운 글을 끄적인다. 노트 한구석엔 귀여운 낙서를 해보기도 한다. 한 입 베어 문 아보카도 샌드위치와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글라스의 차가운 커피. 끝이 없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귓바퀴를 따라 춤을 추는 은은한 풍경소리. 흡사 인상파 화가의 유화 같은 풍경이 오직 내 시간 안에서만 흐른다. 접시 위의 샌드위치 크기가 작아질수록, 넘칠 듯 찰랑이던 커피의 양이 줄어들수록, 눈 앞의 푸르렀던 하늘이 핑크빛으로 변해갈수록,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충만함이, 영원할 것 같은 아름다움이 온몸을 통해 스며든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때 즈음, 진한 나무 냄새가 나는 숙소로 돌아간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냉장고의 차가운 맥주를 챙겨 방 안으로 들어온다. 불을 끄고, 노트북으로 영화 한 편을 틀고, 오프닝 시퀀스에 맞춰 경쾌한 소리로 맥주의 캔을 딴다. 그렇게 그 공간은 잠시 동안 나만을 위한 심야 영화관이 되어준다. 영화가 중간쯤 흘렀을까, 외로움이 찾아 올 틈도 없이 알코올의 진한 향은 꿈나라로 나를 데려간다. 달빛이 스며드는 방 아래, 스크린 속 영화는 메아리 치는 파도 소리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고, 나는 세상모르는 사람처럼 무의식의 그 어딘가 깊고 아름다운 곳으로 사라져 버린다.

 이것이, 내가 오키나와 여행을 계획한 이유다. 한 마디로 줄이면, 쉬고 싶어서.


 내가 알아본 오키나와는 적어도 이런 꿈을 실현시켜줄 3가지 확신이 있었다.

 우선, 넓고 아름다운 에메랄드 빛 바다가 있고, 작고 조용한 카페가 수 없이 많으며, 일본 그 어느 지역보다 밝고 친절한 사람이 많다는 것. 더군다나 휴양지 치고는 세부나 괌, 코타키나발루보다 훨씬 가깝고, 비교적 여행을 많이 다녀 부담이 적은 일본이기까지 했다. 아름다운 바다를 마주한 채 하루가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장소로 오키나와보다 마땅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오키나와로 떠났다.


 그러나 나는 쉬지 못했다.

 오키나와에는 3박 4일 동안 있었는데 우선 첫날 출발부터가 피곤의 연속이었다.

 나는 아무런 이유 없이 출국 전 날 잠을 자지 않았다. 긴장되거나 설레어서가 아니다. 정말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잠을 안 잤다. 짐을 싸는 게 너무 귀찮아 밤 11시가 될 때까지 버티다 짐을 싸기 시작한 게 화근이라면 화근이겠다. 대충 짐을 싸고 나자 갑자기 인터넷 면세점을 구경하고 싶어 졌다. 면세점에선 각종 쿠폰과 적립금을 뿌리고 있었다. 마치 '안 사면 멍청이'라고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장바구니에 넣고 나니 새벽 4시가 넘어있었다. 서둘러 주문하기를 누르고 나서야 다음날 아침 출발은 인터넷 면세점 주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마디로 뻘 짓을 했던 것이다. 그렇게 2시간 눈 붙이고 인천공항으로 향했으니, 내가 여행을 떠나는 건지, 일을 하러 가는 건지 헤롱헤롱 할 수밖에.

 그렇게 두 시간을 날아 도착한 오키나와의 나하 공항은 뜻밖의 습한 더위로 나를 환영했다. 첫날은 차를 렌트하지 않고 나하(오키나와의 메인 도시) 시내나, 슈리성 일대를 뚜벅이로 구경할 예정이었는데, 날을 완전히 잘못 고른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정말이지, 더워서 죽는 줄 알았다. 남국의 날씨를 우습게 봤음을 두고두고 반성하게 만드는 날씨였다. 카라티에 청바지, 거기에 폴리에스테르 재질의 모자라니! 패션 또한 미쳤음이 분명했다. 첫날부터 차를 렌트하지 않은 것을 10초마다 아니, 5초마다 후회했다. 에메랄드 빛 바다는 무슨 얼어 죽을, 이 더위만 가시게 해준다면 인천 앞바다로도 만족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내가 머릿속으로 그려왔던 오키나와 여행과 지금 현실 오키나와 여행 간의 넓고도 험한 간극이 느껴지며 콧웃음이 나왔다. 뭐...? 아보카도 샌드위치가 어쩌고 저째? 아보카도로 귀 싸대기 맞는 소리 하네. 은은한 풍경소리는 얼어 죽을. 은은하게 달라붙는 벌레 때려죽이는 소리만 가득했지. 그 와중에 열심히 셀카봉을 들어 올려 인증샷을 찍어 행복한 척 SNS에 업로드하는 내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되뇌었더라지.

 '괜찮아, 첫날 이잖아.'

 차를 렌트한 둘째 날은 사정이 조금 좋아지긴 했다. 더운 날 걷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던지...! 게다가 원하는 곳이 있으면 마음껏 찾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점이 곧 나를 옥죄어 왔다. 첫 날을 '버렸다'라고 생각해서인지 차가 있는 남은 2박 3일은 아주 뽕을 뽑아야겠다 싶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내가 그려왔던 오키나와 여행은 아예 물 건너갔을 것이다. 어디 한 곳에 진득하게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여유 따위 없어졌으니까.

 셋째 날도 다를 게 없었다. 이 날은 무려 350km 가까이 달렸다. 아침엔 추라우미 수족관 등이 있는 북부 지역에 갔다가 오후에는 미바루 비치 등이 있는 남부지역에 갔다. 이 거리만 해도 왕복으로 200km가 넘는다. 보통 이틀에 나눠서 가는 곳을 그냥 하루 만에 다 가버린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곳에 갔고, 거의 '찍고 오는 식'의 여행을 하고 있었다.

 눈 앞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에메랄드 빛 바다도, 조용한 분위기의 카페도, 친절한 오키나와 사람들도 다 있었다. 하지만 그 풍경들은 내가 꼭꼭 씹기도 전에 목구멍으로 삼켜지기에 바빴다. 눈 앞엔 아름다운 풍경들이 수도 없이 지나가는데, 왜인지 모르게 마음속에 꽉 찬 허한 공기가 빠져나가질 않았다. 이윽고 내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내 마음의 평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지난 여행들을 떠올려 봤다. 열일곱, 친구들과 떠난 도쿄 카메아리에서의 아침 동네 산책이 좋았고, 스물셋에 누나와 함께 떠난 방콕의 낯선 시장 풍경이 좋았고, 다음 해 떠난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부터 바트이슐까지 이어지는 잘츠캄머굿트 도보여행이 좋았으며, 같은 해에 떠났던 태국 꼬꿋섬의 밑도 끝도 없이 여유로운 푸른 바다가 좋았다. 여기엔 공통점이 있다. 특별하거나 유명한 도시의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랜드마크나 관광 스팟이 없다. 그냥 그 동네 사람들이 살아가는 동네나 시장, 덩그러니 놓인 바다나 호수를 낀 길 같은 곳. 나의 여행을 인증하지 않아도 되는, 피부로 그곳의 공기를 흡수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내 마음의 평화가 숨 쉬었던 곳. 내 안의 게으름이 춤을 출 수 있게 그냥 놔뒀던 곳이었다는 것이다.

 내가 오키나와에 만족하지 못한 이유는 너무 열심히 여행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금 게을러도 괜찮은, 아니, 게으르게 여행해야만 했다. 어쩌면 내가 진짜로 원했던 것은 에메랄드 빛 바다도, 아보카도 샌드위치도 아닌 밑도 끝도 없는 게으름이 만들어 줄 내 마음의 평화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 열심히 사는 것 같다. 심지어 여행까지도. 조금 게으르면 어떤가. 치열한 현실을 벗어나 게을러지기 위해 떠난 여행이 아니던가. 하지만 우린 여행에서까지 열심히 해야 할 것만 같다. 언제 다시 와 보고, 언제 또 먹어보고, 언제 다시 경험할까 싶어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스케줄을 꽉꽉 채워둔다. 아아, 이거 어쩐지 조금 씁쓸한 일 아닌가. '언제든 다시 오면 되지'의 태도를 갖지 못하는 것 말이다. 생각조차 염두해 둘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삶을 살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이탈리아 로마에 가면 여행사에 '남부 환상 투어'라는 상품이 있다. 로마에서 출발하여 이태리 남부의 나폴리, 소렌토, 포지타노, 폼페이 등을 구경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 투어인데 현지인들은 이 투어를 조금 미쳤다고 생각한다. 로마에서 나폴리까지의 거리만 약 250km, 왕복으로 이 거리만 왔다 갔다 하더라도 6-7시간 정도가 소요되는데 거기에 그 아래의 섬들까지 하루 만에 쭉 돌아보고 오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남부 '환상' 투어라기보다는 남부 '환장' 투어에 가깝겠다. 혹자는 내게 우스갯소리로 이 투어는 한국인밖에 할 수 없는 투어라 얘기했다. 그 말에 보기 좋게 증명이라도 하듯 투어버스는 한국인 여행객들로 가득했다. 무엇이 우리를 여행지에서까지 이토록 치열하게 만들었을까.


 쉬고 싶어서 떠난 오키나와에서 나는 쉬지 못했다.  남부 환상 투어 버스에 몸을 싣은 여행객처럼 말이다. 하나라도 더 보고, 더 먹기에 바빴다. 어쩌면 이제 게으름은 돈을 주고도, 시간을 주고도 누리기 어려운 사치품이 되어버린 것 같아 씁쓸해졌다.

 오키나와는 계속해서 아름다운 풍경으로, 따뜻한 사람들로 내게 게을러지라 이야기했지만 나는 차마 그러질 못했다. 비워내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자꾸만 무언가를 주워 담으려고만 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먹고, 더 많은 것을 경험해야만 차오를 줄 알았던 내 속은 오히려 텅텅 비어 갔던 것만 같다. 처음으로 게으르지 못한 내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아니, 사실 조금 불쌍했다.

 공기를 따라 흘러가는 코우리 대교의 조용한 바닷바람, 하루를 마감하며 천천히 눈을 감던 미바루 비치의 붉은 태양, 밤새 노래를 멈추지 않던 숙소 뒷산 벌레들의 울음소리는 오키나와가 내게 주었던 커다란 가르침이다. 그저 이 곳에, 여기에, 나를 맡기는 것. 밑도 끝도 없이 게을러져 버리는 것. 그래도 괜찮은 것.

 오키나와는 내게 게을러도 괜찮다고 말했다.


 이렇게 얘기해도 사실 이번 오키나와 여행에 좋았던 점도 있다. 요즘 들어 가벼운 후유증 까지 생기는 것을 보면 말이다.
 다시 찾아가 봐야만 할 것 같다. 그때는 조금 게을러 질 수 있겠지. 열심히 돌아다닌 덕택에 오키나와 지리는 꽤 꾀게 되었으니, 이건 뭐, 장점이라면 장점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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