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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02. 2017

31. 두려움은 없다

두려움에 대하여

 캄캄한 밤 괴한의 습격, 하수구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쥐의 긴 꼬리, 처음 보는 낯선 이국 음식,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높은 곳에 서 있을 때의 아찔함,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겠는 공포영화의 그것, 운전 중 상상하는 최악의 사고, 준비되지 않은 발표 무대, 깜빡하고 잊어버린 중요한 약속, 갑자기 찾아온 부모님 건강의 적신호, 처음 보는 어색한 사람과 함께 해야 하는 시간, 뾰족한 모서리, 기상악화로 흔들리는 비행기, 발 밑으로 기어 나온 바퀴벌레, 곧 세상을 멸망시키기라도 할 듯 몰아치는 폭풍우, 주말인 줄 알고 늦게 일어난 출근일 아침... 또 뭐가 있을까,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


 두려움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만 찾아오는 불청객, 두려움 씨에 대하여.

 어쩌면 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두려움은 아닐까? 우리에겐 모두 죽음이라는 두려움이 있지 않은가.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먹고, 자고, 기도하고, 생활하는 것은 아닌가. 마치 죽음이란 것이 내 삶의 연장선에 있지 않기라도 하듯이. 국가를 만들고, 가족과 친구 그리고 애인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회 속에서 두려움의 존재를 느낄 새도 없이 끊임없이 걷고 대화하고 공부하고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살아간다.

 하나 이 세계의 바탕이자 원동력은 두려움이었기 때문일까, 두려움은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한다. 밥을 먹다 식탁 아래로 불쑥 기어 나온 바퀴벌레처럼 말이다. 바퀴벌레를 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쾌한 감정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거나, 높은 빌딩에서 바라본 발 아래의 아찔한 풍경이 오금을 저리게 한 경험이 있다면 두려움이 어떤 감정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 것이다. 대개 우리가 경험하는 두려움이란 그런 것들이다. 내게 해를 입힐 것 같은, 좀 더 비약하자면 나를 죽음으로 몰 것만 같은 그런 것. '나를 헤칠 것 같다'는 생각이 선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두려움이란 감정이다.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있건 없건 간에.

 이 두려움이란 감정엔 재미있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볼 수 없거나 상상하기 어려운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예능 프로에서 검은 상자 안에 아무 물건이나 동물 같은 것을 집어넣은 채 무엇인지 맞추게 하는 게임을 생각해 본다면 두려움이란 감정을 떠올리기 보다 쉬울 것이다. 프로그램 출연자는 검은 상자 안의 무언가를 볼 수 없기에 상자 속 대상에 두려움을 느낀다. 설마 내 손을 깨물면 어떡하지, 내가 가장 싫어하는 동물 같은 게 들어있진 않을까, 싶은 것이다. 두려움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쉴 새 없이 가정하며 최악의 상황만을 그려낸다. 하나 상자 속의 정체가 공개되면 터무니없던 자신의 상상에 실소를 터뜨리게 된다. 우리가 대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두려움도 그러하다. 처음 보는 낯선 이국 음식이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공포 영화 같은 것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모두 일어나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들과 마주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검은 상자를 앞에 둔 출연자와 같다. 입 안에 들어간 낯선 음식의 끔찍한 맛, 이별로 인해 생길 엄청난 상실감, 소름 끼치게 무서운 공포영화의 장면 같은 것을 찾는 두려움이 손 끝을 따라 상자 속을 휘젓는 것이다. 상자가 열리고 나면, 그러니까 일이 벌어지고 나면, 두려움은 오히려 전보다 훨씬 많이 가라앉는다. 설사 내가 상상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더라도 더 침착하게 된다. 어찌 됐든 우려가 현실이 되었고, 더 큰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선 당장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야 하니까.


 나는 어렸을 적 잠을 자려 누우면 적어도 세 시간 동안은 잠에 들지 못했다. 갑자기 집 안에 괴한이 들이닥쳐 흉기를 들고 나와 우리 가족을 위협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검은 상자 속에 넣은 내 손은 괴한이 들이닥칠 시 어떻게 행동해야 하나 싶어 머뭇거리기도, 우리 가족을 찌른다던지 하는 최악의 망상에 빠져 부르르 떨리기도 하며 끊임없이 밤새 휘저어졌다.

 울기도 엄청 울었다. 곤히 자는 누나를 깨워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지금 누가 집에 들어온 것 같아'라고 얘기하면 '응, 네 친구 왔나 보다'하며 무시당하기도 일쑤였다. 이런 무심한 누나지만 어찌 됐든 구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새벽이 되어서야 잠들었고, 눈을 뜨면 무탈하게 지난밤이 지나갔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당최 귀신같은 것을 무서워해야 할 나이에 왜 괴한이 나타날 것을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만, 당시엔 유독 그런 두려움이 많았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두려움의 주된 원인은 소중한 것을 잃을 수 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었단 생각이 든다. 당시에 부모님의 부재를 상상하는 것은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었기 때문이다. 등굣길에도 이런 상상만 하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부모님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거나 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빠, 엄마가 없는 우리 가족을 상상하는 일은 상상만으로 끔찍하고 죄스럽게 느껴졌다. 누나의 부재 또한 마찬가지. 밤늦게까지 누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면 좋지 않은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치고받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누나가 무사히 돌아와 주기만 한다면 몇 대가 되었건 기꺼이 맞아 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다행히도 대개 상상은 상상에서만 끝났고 해를 거듭할수록 그런 상상에 눈물을 흘리는 일도, 막연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일도 없어졌다.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 줄 것처럼 함께 한 시간이 30여 년 가까이 되어가니 그런 상상을 하는 일도, 그런 상상에 감정을 이입하는 일도 사라진 것이다.

 소중함이 희석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들의 부재가 내게 안겨줄 아픔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소중함을 희석시키는 것은 아닌지.


 그러다 최근, 아빠가 많이 아팠다. 복귀하던 중 엄마에게 '아빠가 응급실에 갔고, 입원을 할 수도 있으니 알고 있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 처음엔 그냥 가볍게 생각했다. 가벼운 복통이거나 맹장염 정도 이려니. 어릴 적의 나였다면 나쁜 상상을 멈추지 못해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겠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그만큼 아빠의 시간은 늘 영원할 것만 같이 나와 함께 흘러왔던 것이다. 어느덧 얼굴엔 주름이 깊게 파이고, 머리는 하얗게 샜건만 날 보면 늘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아빠였기에 금방 병원에서 나오겠거니 싶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수술 얘기가 나왔고, 남의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암'이라는 단어가 귓속 깊이 때려 박혔다.. 어릴 적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괴한은 몇십 년이 지나고서야 이런 식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좋지 않은, 나쁜 상상이 나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하고 싶지 않은, 죄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던 나쁜 생각들을 가정하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견딜 수 없는 두려움이 내 심장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소중함은 희석된 것이 아니라 무뎌졌던 것이었다. 아빠의 존재가 무뎌질 만큼 당연한 것이었는데, 언제고 아빠가 사라질 수도 있을 거란 사실을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그 무게는 어릴 적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이건 더 이상 막연한 두려움이 아닌 현실의 두려움이었다.

 수술을 마친 아빠를 찾아갔을 때 아빠는 어느 정도 회복이 된 상태였다. 수술은 다행히 무사히 마쳤고, 잘 관리만 해 준다면 80%까지 회복이 가능하단 얘길 들었다.

 사실 처음엔 CT 결과가 너무 좋지 않아 수술을 할 수 없을 정도란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CT 결과에 이상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심각한 수준의 것이 아니기에 수술을 진행하게 되었다고 했다. 무사히 수술을 마친 아빤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안도의 한숨만 내쉴 수 없던 이유는 아빠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때문이었다.

 "다행이다 싶더라고."

 응급실에 가기 전 날까지 아빠는 정신없이 제 몸을 굴렸다. 회사에서 생긴 문제들을 처리하고, 손주 돌잔치를 치르고, 집 문제를 해결하고, 시골에 내려가 몇 십만 평 부지에 모를 심고... 그래도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처리해야 할 문제들을 어느 정도 해결해서, 끔찍한 결과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이 '다행이다'였다고 했다.

 '아빠만 다행이면 다야?'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꾸욱 삼켰다. 아빤 해야 할 일을 다 했을진 몰라도 난 해야 할 일을 단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전역하면 모아뒀던 적금으로 같이 여행도 가야 하고, 배우로서 성공한 모습도 보여줘야 하고, 집도 한 채 사줘야 하고, 무엇보다 내가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도대체 다행은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앞으로 이런 두려움을 또다시 마주할 날이 내가 살아온 날보다 훨씬 많아질 거란 생각에 우울해졌다.  예의 없는 두려움씨는 연락도 없이 찾아와 사정 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렸다. 모두에게 끝이 있단걸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문을 두드려 댈줄은 몰랐다. 마음대로 쳐들어와 나를 어떻게 해도 상관없으니 아빠만은 구해달라고 얘기하고 싶었다. 정말 소중한 것 앞에서 두려움은 그런 것이었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당겨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 간절함.


 앞서 말했듯 두려움이란 대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가정해서 생긴다. 두려움은 어떤 환경이나 상황 때문이 아닌, 오직 나의 심장에서 피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싶다. 우린 늘 긍정적인 결과만을 꿈꾸지 않는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어리석게 감정을 쏟고 싶지 않다. 애초에 없는 감정을 잉태시켜 기어코 괴물로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정말 눈 앞에서 소중한 것이 사라질 뻔한 경험을 해보니, 이건 내가 어쩔 도리가 없는 감정이란 것을 알아버렸다. 두려움이란 애초에 없는 감정이라 아무리 되뇌어도, 밝고 좋은 생각들로만 덮어내려고 해도, 절대 잃고 싶지 않은 소중한 것 앞에선 아무런 힘을 쓸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그럼에도 동시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소중한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아빠를 지킬 수만 있다면, 내가 감당해야 할 두려움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하수구에서 튀어나온 새까만 쥐의 긴 꼬리도, 뾰족한 모서리도, 처음 보는 낯선 이국 음식도, 세상이 무너져라 쏟아져 내리는 폭풍우도,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고. 그 녀석이 어떤 모습을 했건 소중한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몇 번이고 기꺼이 검은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으리라고. 소중함이 만드는 용기가 얼마나 큰 힘인지 알게 하리라고.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한 가지 전제를 두고. 지키고 싶은 소중한 것 앞에서, 두려움은 없다. 다시 말해, 간절함 앞에 두려움은 없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소중한 것을 지킬 수만 있다면, 간절함이 두려움을 밀어낼 수만 있다면, 내 사전에 두려움은 없다 믿고 싶다. 아니,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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