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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12. 2017

32. 남자의 털

인체 탐구보고서(3) 털

 나는 털이 좀 많다. 스트레스가 될 정도로 많은 양은 아니나 내 몸의 털을 본 사람들은 '생긴 것에 비하여 털이 많다'라고 흠칫 놀라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거울을 보며 음, 이렇게 생기면 털이 많지 않게 생긴 건가, 하고 혼잣말을 해본다. 그런 얘기엔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뭐랄까, 조금 머쓱한 기분이 되기는 하는데 그저 내 몸에 무성하게 자란 털들을 바라볼 뿐이다. 그럼 궁금해진다. 이것들이 어디에서 왔을까, 하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털이 자라기 시작했다. 매끈하던 겨드랑이와 다리, 그리고 성기 중심으로 털이 한가닥씩 자라기 시작하더니 어느 날 보니 무성했다. 처음엔 께름칙해 밀어보았지만 금세 다시 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후론 그냥 두기로 했다. 계속 보다 보니 나름 귀엽기도 했어. 여름을 제외하면 옷으로 가릴 수 있으니 그냥 뒀고, 그냥 둬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털이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는 문제가 됐다. 고등학교 시절 무용 수업을 하던 날이었나. 수업을 받기 위해 바지를 무릎 위까지 접어 올리고 있었다. 다리엔 털이 자라 있었고, 친구들은 수업에 집중하느라 내 다리털을 인식하지 못했다. 수업이 끝나자 그들은 그제야 내 다리털을 발견했다. 그리고 경악하며 얘기했더랬지.

 "징그러워!"

 징그럽다니! 충격이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생각했던 '털이 난 다리'가 누군가에게는 징그러운 것이라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그때서야 '아, 털은 이상한 거구나'싶었고, 다음날 바로 해결하여 수업에 참여했다.

 다음 날 수업에 들어간 내 다리는 한쪽만 보기 좋게 매끈해져 있었다. 그리고 전날 징그럽다 얘기한 친구에게 찾아가 털이 난 다리와 매끈해진 다리를 보여주며 물었다.

 "어느 쪽이 낫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한 행동이 조금 엽기적이긴 하나 어째 이해가 되는 면도 없지 않다. 당시의 난 혼란스러웠던 거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털이 난 다리'가 징그럽다면, 일부러 다 밀어버린 '매끈해진 다리'는 안 징그러울까? 그러나 그 친구는 매끈해진 내 다리 보고도 징그럽다 얘기했다. 아니,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적당한 양이어야 하는 건가? 그렇다고 미용실에 가서 다리털 좀 예쁘게 컷트해주세요, 할 수도 없는 노릇 이잖는가.

 노출이 심한 여름엔 문제가 더 심각하다. 여름에는 반바지를 입는다. 더워서 안 입을 수가 없다. 문제는 반바지를 입으면 다리털이 죄다 노출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민소매는 또 어떤가. 버스나 지하철에서 손잡이라도 잡으려 팔을 뻗었다간 인터넷에 '겨드랑이에 날개 단 천사'같은 짤방으로 돌아다닐지도 모르는 일이다.


 대체 다들 왜 이리 털에 집착하는 걸까? 아니, 머리털은 밀든 기르든 지지고 볶든 별 신경도 안 쓰면서 다리털, 겨드랑이 털엔 왜 이리도 민감하게 반응할까? 다리털이나 겨드랑이 털도 머리털처럼 미용실을 차리면 좀 잠잠해지려나? 어차피 외계인들이 보기엔 인간들이 머리에 하는 짓이나 겨드랑이 털에 하는 짓이나 똑같다고 생각할 텐데. 이른 아침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닝 겨드랑이 털 펌' 같은 것을 하고 있는 풍경엔 적응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만... 뭐, 어찌 됐든 다 같은 털인걸.


 '왁싱을 하면 되지 않나요?'

 좋은 질문이다. 왁싱이라. 그것으로 해결된다면 하고 싶다. 하나 내가 한쪽 다리를 밀고 갔을 때 친구는 그것도 징그럽다 하지 않았나. 왜 왁싱한 다리를 보고도 그랬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사실 정답은 이미 나와있다. 정답은 하나. 나는 남자이기 때문이다. 털을 밀수도 기를 수도 없는 이유는, 나는 털이 너무 많아도, 너무 없어도 징그러운 '남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의 털이란 게 그렇다. 실로 애매하다. 너무 많아도 징그럽고, 너무 없어도 징그럽다(는 시선을 받는다). 도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대한민국에 나뿐만은 아니었는지, 요즘엔 남성 전용 다리털 제거 면도기도 판매한다. 이 면도기는 털이 1/3 정도만 남은 채로 밀려, 애매한 다리털을 가진 다리를 만들어 준다. 털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과하지 않은 다리. 남들의 시선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다리. 올O브영에서 9,900원으로 두 다리에 자유를 선물하세요. 가 아니고, 아니 도대체 왜 이렇게 피곤하게들 사는 거예요.

 여자의 경우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여자는 아예 '털이 없어야 한다'는 인식이 너무나도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자는 털을 길러야 하나 밀어야 하나 고민할 일이 없다. 그냥 싹 다 밀면 그만인걸.

 그렇다고 여자가 더 편할 거란 얘긴 아니다. 주기적으로 자라나는 털을 왁싱해줘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본다면, 매일 면도하기도 귀찮은 나로선 꽤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군다나 하루라도 밀지 않았다간 말 그대로 봉변당하기 십상 아닌가.


 사실 나는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여자는 '원래' 털이 없는 줄 알았다. TV 속만 하더라도, 남자 연예인들은 무성한 겨드랑이 털이며 다리털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반면, 여자 연예인들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기껏해야 '털 있는 여자'를 개그 소재로 이용하는 것 정도? '여자는 털이 없다.' 그것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학습되어 온지라, 아, 여자는 남자와는 생물학적으로 아예 다른 동물이라 털이 없는 거구나 싶었다.

 그런데 중학교 영어 선생님의 수업을 듣다 그녀의 겨드랑이를 보고는 알아버렸다. 여자도 털이 나는구나, 하는 사실을.

 매일 수업만 끝나면 아이들은 짓궂게도 선생님의 털에 대해 떠들곤 했던 것 같다. 

 "영어 겨털 본 사람!?"

 교실은 영어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다. '어떻게 여자가 제모를 안 하느냐', '냄새난다', '암내 날 것 같다', '더럽다' 등 대부분이 겨드랑이 털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얘기들. 간간히 '겨드랑이 털이 아니라 그림자 때문에 어둡게 비치는 거다'라며 선생님의 입장을 감싸는 몇몇 여학생도 있었다. '여자도 겨드랑이 털 나거든!'이라고 얘기하는 여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그 말을 뱉는 즉시 '본인한테도 털이 나고 있다'는 '털밍아웃'이 될 테고, 그것이 두려웠을 테니까.

 영어 선생님의 겨드랑이 털은 꽤 오랫동안 학생들 사이의 뜨거운 감자였다. 여전히 선생님은 조롱당했고, (당시엔 그렇다고 인식하지 못했지만) 성희롱 수준의 발언까지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 선생님은 소문을 의식했는지 더운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카디건을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살은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영어 겨땀 본 사람?!"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도 겨드랑이에 땀이 나고 털이 자라는데, 이게 욕먹을 일인가? 더군다나 조롱의 말들을 쏟아내는 아이들은 대부분이 나와 같은 남자아이들이었다. '털이 난' 남자아이들 말이다.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의 의견에 동조해주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 있거나 소심하게 선생님의 입장을 감싸주는 정도였다.

 남자 선생님이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봤다. 그러고 보니 남자 선생님의 털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에게 노출되고 있었다. 체육 선생님은 민소매를 입을 때마다 겨드랑이 털이 보였고, 다른 과목 남자 선생님들도 반바지를 입어 다리털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영어 선생님이 욕먹은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여자라서.


 '여자의 털'문제가 시사하는 바는 우리 사회에 여성이라는 위치가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동안 여자는 그냥 '존재'가 아닌 '(남성으로부터) 보여지는 존재'였던 것이다.

 남성의 경우, 보이는 것 그대로가 인정된다. 겨드랑이 털이 있든, 다리털이 있든, 그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는 것이다. 반면 여성은 남성에게 '보여지는 존재'로서 재단된다. 긴 시간 동안 늘 선택받아야만 하는 입장이었던 여성은 남성들의 시선을 충족시켜 줘야만 했다. 겨드랑이와 다리에 털 한가닥 없이 매끈한 모양, 어쩌면 그것이 남성들이 바란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것은 정답이 되었다. 지키지 않으면 큰일이 되는 약속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게 오늘, 지금 까지 와 버렸다.

 이런 약속은 나와 같은 '남자의 털'도 피곤하게 만든다. 과거 남자의 털은 방치 해도 되는 것이었을진 몰라도, 오늘날, 그러니까 '남자들도 관리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지금은 기르지도 밀지도 못하는 '애매한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다 밀고 다니면 놀림 섞인 '여자냐?'같은 소리를, 너무 길렀다간 '징그럽다', '관리 좀 해라'같은 소리를 들을게 뻔하다.


 비단 털뿐만이 아니다. 털은 여성과 남성, 너와 나 사이를 가르는 의미 없는 수많은 장애물들의 메타포일 뿐이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이런 의미 없는 일에 에너지를 소모하는가를 알 수 있다.

 내 몸엔 털이 있다. 그게 당연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의 몸에도 당연하게 털이 있는 것이다. 모든 게 당연하다. 논란이 될 만한 문제가 전혀 없다. 문제가 있다면 그건 단 한 가지, 편견뿐이다.

 어떤 여성이 털을 길렀든 어떤 남성이 털을 밀었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할 수 없다. 성별뿐만이 아닌 종교, 인종, 사랑에 있어서 개인의 선택은 지극히 개인의 문제다. 만약 이해할 수 없다면, 이해하기 힘들다면 그저 눈을 감으면 그만이다. 그 누구도 억지로 당신의 눈을 열어 '내가 기른 다리털 좀 보시라구요!'하지 않는다. 털이 병균처럼 옮아 당신 겨드랑이에 살포시 앉아 싹을 틔우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쾌함이 가시지 않는다, 싶으시다구요? 집에 가셔서 샤워 후에 알몸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서 보시길 추천합니다. 거울 속의 그 사람, 완벽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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