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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n Jun 14. 2017

33. 나이 먹는 게 그렇게 싫어요?

나이 답게 말고, 나 답게

 시간이 참 빠르다. 시간이 흐르는 속도는 나이와 비례한다고들 하던데, 해를 거듭할수록 느껴지는 이 속도로 봐선 결코 틀린 얘기가 아닌 것 같다. 나이를 먹을수록 시간이 빨라진다. 지금도 봐봐. 벌써 6월의 중순인걸.

 이렇게나 시간이 빠르게 흘러 버리면 나이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다. 시간이 빨리 흐른다는 건 빠르게 나이 든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러고 보니 벌써 20대 후반이다. 소녀시대는 벌써 서른을 앞두고 있단다. 맙소사. 어리다고 놀리지 말라던 소녀시대가, 영원한 십 대일 것만 같던 내가 벌써 20대 후반이라니. 말도 안 돼.

 이 속도대로라면 30대는, 40대는 더 빨리 오겠지. 걱정된다. 이 사실에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이유는 나도 모르는 새 20대 후반이 되어버린 지금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나, 해 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데?'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사실 사람들은 '나이 매뉴얼'같은 것을 숙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잇대에 맞춰해야 할,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나 행동 양식을 정리해놓은 매뉴얼 말이다. 10대 때는 얌전하고 성실하게, 무엇보다 '학생답게' 행동할 것, 20대는 대학에 가고 취업 준비도 시작하고 끊임없이 부딪히며 열정적으로 살아갈 것, 30대는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결혼도 하고 4,50대를 위해 성실하게 일하며 살 것, 같은 내용이 적혀있는 매뉴얼, 매뉴얼이 이러하니 내 미래에 기대보단 걱정이 앞서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웃기는 사실은 우리들 대부분은 이 매뉴얼에 반발하지만 결국 이 매뉴얼대로 살아간다는 것. 더 웃기는 건 더 나아가면 다른 이들에게 이 매뉴얼을 전파시키며 산다는 것이다.

 학생 때 그렇게 머리를 기르고 싶어 하던, 어른들 말에 반발심부터 생기던 아이가 나였다. 그러나 지금은 머리를 기르고 교복을 줄여 입는(대부분은 어른 흉내를 내려하는) 10대들을 보면 나는 '저때는 왜 학생다운 게 가장 예쁜지 모르는 걸까'하고 답답한 한숨을 내쉬고 있다. 하하. 다들 이렇게 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매뉴얼의 쟁점은 '나잇값'에 있다. 왜, 20대처럼 사는 60대를 보거나 30대처럼 사는 10대를 보면 '나잇값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나잇값 하라'는 말, 솔직히 정말 별로다. 왜 10대는 10대답게, 20대는 20대 답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꼭 이런 패키지 박스 같은데 가둬 놓고 분류하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아. 상대방의 나이, 성별, 인종, 생김새, 직업, 뭐 그런 것들로 끊임없이 분류해놓고 첫인상이 좋네 어쩌네 운운하잖아. 사회라는 복잡한 네트워크 속에서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야 하는 인간의 특수한 환경상 그 방법이 제일 편하긴 하겠다만. 나이나 성별 같은 걸로만 내 정체성이 규정된다면 나 억울해서 잠 못 자요.

 '나잇값'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같은 1년을 살아도 살아온 환경과 쌓여온 경험 자체가 다른데 단순히 축적된 연수로만 '값'을 매긴다는 거, 좀 웃기지 않은가? 그냥 20대 답게 말고 나 답게 살 수 있는 방법 없을까.


 나이를 둘러싼 프레임이 불편하다. 솔직히 나이라는 거, 우리가 만들어낸 거잖아. 인간이란 종족이 탄생할 때 연도나 나이 같은 개념이 있었을까? 편의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장치일 뿐이다. 성장해서 늙어 죽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지닌 공통점이니, 이 사이에 간격을 두고 '나이'를 만들자 해서 나이가 탄생한 것이라 추측해본다.

 그런데 이 나이라는 게 단순히 성장의 의미로만 쓰이질 않는다.

 '나이 한 살'이 던지는 의미들을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매년 새해나 생일이 되면 무탈하게 한 해를 보냈음을 축하하는 동시에 한 살 더 먹었단 사실에 우울해한다. 나이 든 복학생의 이미지를 수도 없이 개그 소재로 사용하는가 하면, 화장품 광고에선 대놓고 '안티 에이징'같은 단어를 씀으로써 사람들이 얼마나 나이를 혐오하고 있는가를 반추하게 만든다. 축축 처지는 피부와 ET처럼 툭 튀어나온 뱃살, 날이 갈수록 하얗게 새는 머리카락과 기미, 주근깨. '나이 먹는다는 것'에 우리가 품고 있는 이미지들이다. 좋은 점이라 해봐야 남들보다 오래 살아 얻게 된 지혜 정도가 있으려나. 좋은 점도 이것 하나뿐이다 보니 영화나 소설에 등장하는 '지혜로운 노인'은 닳고 닳은 클리셰가 되어버린 지경이다. 사람들은 나이에 수도 없이 많은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한 편 지혜롭기까지 바란다. 이건 뭐, 열정 페이 운운하는 악덕 업주와 다를 게 뭐야.

 물론 나이가 들면 피부가 처지고 건강도 약해지고 머리카락도 하얗게 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6,70대가 되어서도 탱탱한 피부에 풍성한 머리칼을 지녔다면 오히려 그게 더 어색하지 않은가. 문제는 사람들은 이 '자연스러운' 현상에 부정적인 생각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마치 나이 먹는다는 것이 커다란 우울 덩어리라도 된다는 듯이!


 나이 먹어서 좋은 것들을 생각해보자. 나이를 먹으면 그만큼 경험이 쌓여 삶에 노하우가 생긴다. 잦았던 실수도 눈에 띄게 줄어든다. 대부분의 사건, 사고는 초연하게 받아들여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며 무엇보다 20대 지금의 나처럼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일이 없다.

 <꽃보다 누나>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배우 윤여정 선생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만약 젊은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돌아가겠느냐'는 질문에 윤 선생님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라고 대답했다. 젊을 때로 다시 돌아가 그 격동의 불안한 시절을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후회 없이 나이를 먹은 것처럼 느껴져 부러운 한 편,  누구나 젊음을 꿈꿀 거라는 생각에 보기 좋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 인터뷰였다. 윤 선생님에게 있어서 나이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던 거다.

 이런 시각에서 나이를 바라본다면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도, 얼굴 곳곳에 패인 주름들도 어쩐지 그 사람만의 역사처럼 느껴져 아름답게 보인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끊임없이 쓸리고 깎여 완성된 장엄한 암벽 같달까. 저마다의 시간이 고유의 문신이 되어 얼굴에 새겨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숭고하고 멋진 일인가.


 나는 나이 먹는 것이 꽤 좋다. 10대 때의 '빨리 나이 먹고 싶다'란 생각은 치기 어린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했지만, 20대가 되어서도, 20대 중반이 넘어서도 여전히 나이 먹는 것이 좋은 걸 봐서 나는 원래부터 나이 먹는 걸 좋아하는 체질인가 보구나 싶었다. 어찌 됐든 나이 먹는다는 건 성장을 의미하고, 성장의 참 의미는 전보다 더 나은 내가 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변화가 미비할지라도 전보다 많은 것이 축적되는 나 자신을 느끼는 게 즐겁고, 전과 같이 삶이란 미로를 심하게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평화를 부른다.

 다만 문제는 매뉴얼, 그놈의 매뉴얼이다..! 매뉴얼에 적힌 20대의 숙제를 완성하지 못해서 인지 20대 후반에 접어든 나는 조바심이 난다.

 이젠 그만 버리고 싶다. 20대답게 말고 나 답게 살고 싶다. 나잇값 같은 거, 안 하고 싶단 말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비단 나뿐만은 아닌지,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라던지, <우리들> 같은 영화가 많은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창문을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의 주인공 알란 할아버지는 그간 영화에서 지겹도록 보여준 자고로 노인이란 지혜롭기만 해야한다는 통념을 보기 좋게 깨 주었다. 100세 노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스펙터클한 여정을 보여주는데 말 그대로, 나잇값 못 하는 할아버지!

 누구나 경험했을 듯한 초등학생의 미묘한 감정선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 <우리들>도 마찬가지다. 등장인물들은 죄다 초등학생이지만 그들은 가장 근본적인,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건드린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20대와도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들'이 아닌 '우리들'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마냥 초등생 같아 보이지 않는, 말 그대로, 나잇값 못 하는 영화 <우리들>.

 더 많은 나잇값 못 하는 영화가, 소설이, 친구들이 생겼으면 좋겠다. 70대의 뜨거운 사랑을 담은 로맨스 영화가,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50대를 위한 소설이, 삶과 죽음을 논하는 10대의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나잇값 못하면 어때? 내 밥값만 하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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